따뜻한 마음들의 교환
여름방학이 끝나면 새 학기가 아닌, 새 학년이 시작되는 이곳, 큰 아들은 어느새 6학년 형아가 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여름은 강렬하게 뜨겁고 파랗게 빛나는 만큼 사그라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어서 8월이 끝나가는구나, 아쉬워하기가 무섭게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이 된다. 후덥지근 뜨끈하게 끈적이던 아침 공기가 어느새 시원하고 상쾌한 아침 바람으로 바뀌면 이곳에서는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기나 긴 방학과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들과, 새 학년이 시작되는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푹 쉬고 일상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달콤한 휴가가 끝난 아쉬움과 함께 돌아온 일상에 대한 기대감이 뒤섞여 독특하고 오묘한 새 출발의 기분이 드는 계절이 바로 이곳의 가을이다.
크로아티아의 학제는 5년의 초등교육 기간을 가진다. 우리 큰 아들은 영국 학교를 다니고 있어서 조금 다른 학제가 적용되는데, 영국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6학년까지 초등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 아들은 아직 초등학생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데, 올 가을 들어 부쩍 청소년 티가 난다. 아침마다 머리를 감고 왁스를 바르 것 하며, 생전 관심 없던 운동화 모델을 사달라 하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센터로 놀러 나가기도 하는 등 새로운 행동들을 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대견한지 어느새 훌쩍 자랐구나 싶어 찌르르한 마음이 울컥 들기도 한다. 발 사이즈는 작년에 이미 나를 앞질렀는데, 올 초에는 키도 나를 따라잡았다. 손도 발도 나보다 크고 긴 아이를 바라보면서, 세상에 내 뱃속에서 나와 단풍잎 같이 자그마하던 손과 귀여워서 매일 쪽쪽 빨아대던 내 손바닥보다 작던 발을 가졌던 아이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만큼이나 자라났다니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몇십 년째 늘 그대로인 어른의 몸을 갖고 살아가다 보니, 사람의 몸과 형태가 자라나고 변화한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치 나와는 다른 생물체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아쉬우면서 대견하고 뿌듯한 마음과 함께 가장 많이 드는 감정은 그리움이다. 이제 다시는 내 생애 가장 경이롭고 사랑스럽던 그 존재를 볼 수 없구나 하는 아쉬움과 그리움. 인간이란, 인생이랑 참 신비로운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밀려드는 요즘이다.
그렇게 쑤욱 자라난 큰 아들이 6학년이 되자마자 갑자기 친구와 레모네이드를 팔아 돈을 벌어보겠다고 했다. 초기 자본금과 인프라는 절친인 헨릭 엄마가 지원해주겠다고 했다면서, 주말에 집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의 국립공원 산행로 입구에서 레모네이드를 팔겠다는 것이다. 헨릭 엄마에게도 연락이 와서 필요한 것들은 자기가 준비할 터이니 걱정 말고 애만 보내라며 호언장담을 했다. 신랑에게 이야기하니 씩 웃으면서 대견하고 귀엽다며, 한번 장사를 해 봐야 돈 무서운 줄 알고 힘든 줄 안다며 좋은 경험일 것 같다기에 아이를 첫 삶의 현장으로 내보냈다. 첫날에는 내가 갈 수 있는 상황이 안돼서 가보지 못했는데 보내오는 사진을 보니 꽤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레몬 2킬로 정도를 짜서 레모네이드를 손수 만들어 판매하는데, 한 잔 당 10쿠나, 우리 돈으로 하면 약 1300원을 받고 판매했다. 목표 금액은 250쿠나, 25잔 판매란다. 25명에게만 팔면 된다는 계산이면 쉬울 것 같지만, 사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나오게 하는 것이 어디 쉬운가. 아이들은 희망과 패기에 차 있었지만 나는 속으로 아이고야,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귀엽고 풋풋하기도 하고. 첫째 날은 가보지 못했지만, 둘째 날은 작은 아이도 데리고 한 잔 사주기도 할 겸, 지원 사격을 나섰다.
그래도 자그레브에서 가장 유명하고 유일한 등산로여서인지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 사실 가을 초입, 가장 등산하기 좋은 날이기도 하다- 다행히 귀여운 남자아이 둘의 장사에 애정의 마음으로 한두 잔씩 사 주신 어른들이 많았던지 첫날 목표 금액을 달성하고 신나 하던 둘의 모습에 되려 내가 더 기쁘고 다행이란 마음이 들었다. 목표 금액을 달성 못해도 그 나름의 경험과 교훈이 되겠지만, 그래도 첫 경험이 성공적이면 더 기분이 좋으니까. 훨씬 긍정적으로 삶과 새로운 경험을 맞이할 수 있는 작은 자양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보기도 하고. 같은 반 아이들이 굳이 그 산 초입까지 엄마 차를 타고 와서 한두 잔 사서 마셔 주기도 하고, 손재주가 좋은 같은 반 여자 아이는 손수 판매 간판을 멋들어지게 만들어 가져오기도 했다. 다들 친구의 첫 경제활동에 지대한 관심과 지원을 보내주는 걸 보면서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아이들이 주고받는 선한 마음들이 주는 따쓰함과 에너지가 내게도 전달되어 보이지 않는 힘이란 게 이런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반 친구 엄마들도 웃으며 레모네이드 한잔을 사서 마시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었다.
나도 식당을 운영하고 있지만, 장사라는 게 돈과 물건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아도 그 이면에는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맞닿아 있다. 똑같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 당시의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른 기분의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 경험이 그 사람을 다시 식당으로 불러오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든 일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지는 일이고 아무리 사소하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결국 마음과 마음의 교감이 바탕이 되는 것이라는 걸 마흔 줄에 들어서야 어림 풋이 깨닫는 중이다. 그게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오랜 세월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우리의 장점이니까. 아이들의 첫 경제활동에 미숙해도 힘을 실어주는 주변의 어른들과 또래의 친구들, 그리고 일면식도 없던 지나가던 어른들의 애정 어린 응원을 발판으로 한 사람의 인간이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나는 그 중간 과정을 보면서 참 따뜻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모두 엮여 있구나. 식상하고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던 결국은 사랑이라는 진부하던 말이 진실이구나 느껴지는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부모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트림까지 시켜주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작은 생명체를 얼추 키워놓고 나면, 와 내가 사람을 한 명 키워냈구나 하는 신기하고 우쭐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우쭐한 마음은 아이가 청소년기에 접어들며 자기 스스로 하나씩 경험해 나가고 이루어가며 자신의 인생을 그려나가는 걸 보면, 다시 깨닫게 된다. 아, 나는 그저 조력자일 뿐이구나. 한 생명체가 자기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천천히 헤쳐나가는 걸 보며 다시 겸손하고 경이로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부모가 그런 마음이 드는 것처럼 아이도 혼자 살아낼 수 없다. 나 혼자 헤쳐나간다고 생각하는 그 길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사랑의 손길이 뒷받침되고 있는 것이다. 그중의 으뜸은 물론 부모다. 헨릭 엄마의 말에 마음이 다시 찌르르했다.
"초기 자본금은 내가 투자해 주는 거야. 그 정도의 지원은 있어야 일어나고 성공할 수 있는 거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딱 적당한 그 정도의 부모의 역할이 앞으로의 나의 과제구나. 아이가 홀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적당한 거리 유지. 제일 어려운 '적당한' 그것을 위해 늘 깨어 있고 살펴야 함을 오늘도 다짐한다.
싱그러운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던 산 입구에서 만난 기분 좋고 고마운 인연들. 세상을 먼저 살아온 어른이 인생길에 서 있는 어린이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삶과 삶이 연결되는 모습이랄까. 세상이 돌아가는 작은 우주를 본 기분이었다. 그리고 늘 마음에 새긴다. 나도 언제든지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