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렸던 꿈을 찾아서..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모르겠지만 무엇인가 해야 하는 나이가 된

by 유비

2장 나락, 회피형 인간


사람을 편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자존감은 낮으면서, 자존심은 강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게 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이 자존감이 낮을 이유가 뭐가 있었을 까?" 하지만 그때는 이제 하고 싶었던 것을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 나에게 좀 컸던 것 같다. 중학교는 어찌어찌 그래도 잘 졸업을 했다. 우리 중학교는 고등학교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해당 고등학교로 입학하게 되었다. 남중, 남고 끔찍했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두발은 나름 MZ 세대의 주축이 되는 나이대이지만 스포츠머리, 뉴스에서도 하지 말라는 체벌은 맞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을 정도였으니, 우리 학교만 치외법권이었나 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혈기 왕성한 남중, 남고생들에게 체벌은 사람이 극도로 엇나가지 않게 하는 좋은 장치가 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는 것 같지만, 나 같은 일부 소심한 사람들에게 체벌은 자아가 생성되는 나이의 아이에게는 더욱더 표현하고 나서는 것을 어려워하는 위축감을 키운다는 점에서 좋은 것 같지 않다.

얼마 전 "인사이드 아웃 2"라는 영화를 감명 깊게 봤다. 주인공 라일리의 사춘기 시절 마주하는 여러 감정들과 신념을 다룬 영화였다. 이러한 시기의 형성되는 성격과 신념은 매우 중요하다 생각이 드는데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아이가 자라다 보면 강제로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야 하기 때문에 올바른 신념과 성격이 형성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무튼 나의 고등학교 시절도 순탄치 않았다. 흔히 요즘 어린 사람들이 "세상이 나를 억까한다."라는 밈을 자주 사용하듯이 내 고등학교 시절은 온 세상과 신이 나를 미워하는 것을 똑똑하게 보여주었던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내가 더 이상 축구선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걸 깨닫고 나를 돌아보니 내가 칭찬받는 것과 잘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몰랐다.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지하 맨틀까지 떨어졌다.

학교에 가기 싫었다. 평소 사교성이 좋아 주변에 친구들이 많았던 나이기도 했고, 아무도 내 인생에 관심도 없는데 그때에는 "나만 하고 싶은 것이 없다.", "나만 꿈이 없다."와 같은 이유로 자존감도 떨어지고 사춘기 시절 아직도 어린애 같이 초등학교 그 시절 나를 믿어주고 서포트해주지 않으셨던 부모님에 대한 원망은 절정으로 커지고 있었다.

매일 학교에 간다 하고 나와서 아파트 놀이터, 또 하염없잉 돌아다니며 담배 피우고, 혼자 만의 세상에 빠져서 허망한 망상과 안 좋은 생각들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걱정이 커진 부모님과 선생님은 나를 때려도 보고 잔소리도 하셨지만, 이제는 머리가 커져 듣지도 않고 세게 대들며 반항을 하며 부모님의 걱정을 키웠다.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정신과 상담도 받게 되었다. 처음에 병원에 갔을 때는 쪽팔려서 싫다고 엄마와 한바탕 했지만, 점점 다니면서 유일하게 내가 웃고, 솔직한 말을 할 수 있었던 곳이 정신과에서 나와 매주 수요일 1시간씩 상담을 해주시던 선생님과의 시간이었다.

그동안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거나, 칭찬해 주고, 귀담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직업이 그렇다 보니 나의 얘기를 들어주었고, 공감해 주었고, 지금 봤을 때는 눈 씻고 봐도 칭찬할 구석이 없었던 때이지만 꾸역꾸역 칭찬해 줄 점을 찾아 칭찬을 해주시며, 나의 자존감을 올려주셨다.

그 시절 내가 부모님보다 신뢰하고, 좋아했던 사람이 정신과 담당 의사 선생님이었다. 매주매주 꾸준하게 상담을 받으며 가끔 용기를 가지고 학교도 가보고 조금 변화가 생기나 하던 참에 염병할 내가 뭐가 그렇게 죄인이기에 또 천벌을 받게 되었다.


주말에 자주 가던 피시방에 앉아있었다. 갑자기 발목에서 "똑" 하는 소리가 났다. 집에 가려고 일어나는 순간 나는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에 꾸역꾸역 다리를 질질 끌며 들어가 엄마에게 걷기가 어렵다고 말을 했지만, 집에서 이미 양치기 소년이었던 나의 아프다는 말은 엄마에게 단지 학교를 빼기 위한 수작으로 들릴 뿐이었다.

어머니는 집 앞 동네 병원 가서 물리치료나 받고 오라 하셨고, 몇 번이고 동네에서 돌팔이로 유명한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아도 나아지지 않자, 집 앞 다른 병원에 엄마랑 함께 가게 되었다.

x-ray를 찍고 기다리고 있는데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엄마를 불렀다. "학생 어쩌다 다쳤어?"라고 물으셨고 나는 "가만히 있는데 똑 소리가 나더니 못 걷게 되었어요"라고 솔직히 말했다.

그게 모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신 의사 선생님이 심각한 표정으로 어머니 일단 아드님의 다리뼈와 연골이 다 으스러졌고요, 이것 좀 보시라면서 내 또래 다른 환자의 x-ray 사진과 나의 사진 또 80대 노인분의 사진 3장을 화면에 띄우고 비교를 하시며 말씀을 이어가셨다.

아이의 발은 보시다시피 또래 친구의 발목과는 다르고 오히려 80대 할머니의 발과 똑같이 되어있다고 하셨다. 뼈와 연골 으스러진 것도 모자라 퇴행성 관절염도 있단다. "하 진짜 하나님 내 꿈은 축구선수라고요.." 안 풀릴 놈은 끝까지 안 풀린다고 당장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해야 한다 하셨다.


그제야 꾀병인 줄 알았다가 심각성을 깨달은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서울대 병원으로 갔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제일 많이 한 의사 선생님 중 한 분이실 텐데 내 발 사진을 보시고 갑자기 전화기를 드시더니 다른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들을 부르시고 서로 토론 같은 것을 하시더니 우리한테 오셔서 이런 발은 처음 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고 하시는 말씀이 "어머니 사실 수술을 성공할 수 있을지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해보고 싶습니다."라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선생님 ,, "제 꿈은 축구선수예요,, 실험을 위한 발이 아니에요" 불안했지만 철없던 나는 학교를 안 가도 된다는 사실과 부모님한테 아프단 게 진짜라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이 뿌듯했다.

대망의 첫 번째 수술, 어리다는 이유로 척추 마취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6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다리뼈를 사저 없이 당겨서 뽑으시고 뭐를 하시는데 도시락 얘기, 다른 의사 선생님 험담 등 의사 선생님들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수술을 하셨다. "선생님들 집중해 주세요,,, 제 꿈은 축구선수예요" 수술이 끝나고 한 달 정도 방에서 누워있다가 수술 경과를 보러 다시 병원에 갔다.

나를 수술해 주셨던, 의사 선생님은 다른 곳으로 가셨다고 다른 교수님으로 배정받았다. 정말 해보고 싶으신 수술 해보시고 가셨나 보다. 어쨌든 새로운 교수님이 새로 찍은 내 발 사진을 보고 절레절레 흔드시며, 박아뒀던 나사도 다 부러졌고 수술 결과가 안 좋다고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 하셨다.


엄마는 분노하셨고 나를 데리고 나와 세브란스 병원으로 병원을 바꾸셨다. 신촌 세브란스 정형외과 전광판에 내 이름이 뜬 후 들어가서 교수님과 인사를 나눴다.

내 MRI 사진을 보신 교수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며 "이 발은 전 세계 어느 의사가 와도 못 고친다 하시면서 수술이 불가능하다 나가달라 하셨다." 아휴 축구는 물 건너갔나 보다. 뭐 이룬 게 없으니 별로 안 힘들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나름 10년 넘게 어린 나이에 품고 있던 꿈을 모두가 반대해서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긴 했지만 마음속에 콩알만큼이라도 미련을 못 버리고 꿈꾸고 있던 것을 이제는 상상조차 못 하시도록 불구로 만드셨나 보다는 생각이 들자 한없이 우울해졌다.

어머니는 세브란스에서 오랫동안 교수를 하고 계신 할머니에게 부탁을 하여 교수님과 다시 만나게 해 주셨고 갑자기 우리를 내쫓으셨던 교수님은 우리를 앉히시고 "어머니 고치지는 못해요, 근데 열어보고 정리는 해드릴게요"라고 말씀을 하시며 이삿짐센터도 아니고 내 발을 청소해 주신다 하셨다.


떨리는 두 번째 수술 이번에는 수면마취를 허락해 주셨다. 수술대기실에 누어 떨고 있는 동안, 한 아주머니가 오셔서 나를 위해 기도를 해도 되냐고 여쭈어보셨다.

고개를 끄덕이니 무릎을 꿇고 내 손을 붙잡고 기도를 해주셨다. 당시 신앙이 없던 나이지만 나름 감사했다.

마취가 되었을 때 꿨던 꿈이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하얀색 공간에 선 같은 형태만 있는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고 기차가 한대 왔다. 한 명씩 기차에 타고 있었고 내가 탈 차례가 되었을 때 기차 앞에 있던 한 사람이 너는 아직 아니야 하면서 나를 확 밀쳤고 그 순간 간호사님의 "환자님 일어나세요 하는 소리와 함께 마취와 꿈에서 깼다.

몇 달 후 깁스를 풀 겸, 경과를 들으러 병원에 찾아갔다. 의사 선생님은 내 발은 다 썩어있었다며, 엄마한테만 개인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셨다. 신기하셨나 보다, 굳이 폰으로까지 찍어두신 걸 보면...

무튼 의사 선생님은 운동은 물론이며 앞으로 살면서 백화점 같은 쇼핑몰에서 쇼핑도 하지 말라하셨다. 그냥 누워만 있으라는 듯이 평생 운동과 쇼핑은 하지 말라 하셨다.

집에 돌아온 후부터 더 이상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과 약을 먹으며 하루에 절반이상을 잠만 자고 학교는 물론 방구석에서 몇 달 동안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나온 기억이 없다.

나 때문에 가족 분위기 또한 망가졌다. 거실에서 엄마는 매일 우시는 소리가 들렸고 아빠는 퇴근 후 내방을 쓱 보고 한심한 놈 등 내가 자는 줄 알고 안 좋은 소리를 하시며 나가시는 게 매일 같이 들렸다.

매일매일 다 큰 놈이 방에서 질질 짜기만 하고 모든 상황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유급을 당하더라도 고등학교만은 나오라던 부모님께, 요리를 하겠다는 둥, 그날 핑계를 위해 급조해 낸 꿈들을 말하며 그만두겠다 선언하고 매일 같이 신경전을 펼쳤다.


홧김에 가출을 했다. 새벽에 아빠가 부르셔서 아파트 근처 공터에서 만났다. 담배를 한대 피우시더니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그렇게 힘들면 내일 가서 그만두라 하셨다.

다음날 부모님과 학교에 찾아가 자퇴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담임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본인 조카도 자퇴를 하고 무엇을 하며 잘 지낸다는 둥 한 번을 안 말리고 진행시키셨다. 어지간하게 보기 싫으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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