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변호사시험 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는데, 막상 합격자 명단에서 내이름과 수험번호를 보는 순간 드는 감정은 기쁨보다도 ‘드디어 끝났다’라는 안도감에 더 가까웠다. 아빠의 카카오톡 프로필사진이 내 합격증서로 바뀌었고, 엄마는 친척들을 불러 잔치를 열었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두 발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고, 내가 딛고 선 바닥이 조금은 단단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 해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제는 나도 사회인이니까. 열심히만 살면 내 집 하나쯤은 가능하겠지”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첫 월급이... 96만 7천 원이라고요?”
실무 수습 자리 면접을 보던 날, 능숙한 변호사처럼 보이고 싶어 ‘모나미룩’이라 불리던 검정 정장 한 벌과 흰 셔츠, 검정 하이힐을 한 켤레 샀다. 그런데 첫 월급 명세서를 받아든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세전 100만 원. 실수령 96만 7천 원. 변호사는 월에 350만 원은 거뜬히 버는 직업인 줄 알았는데, 첫 월급을 받기도 전에 합격 턱을 내고, 출근복을 마련하고 나니 통장 잔고는 바닥이었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변호사회 등록비 600만 원. 그 돈을 내야 ‘진짜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내 6개월 실무수습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아도 20만 원이 모자랐다. 나는 그날 바로 은행에 가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변호사가 되는 순간부터 나는 빚쟁이가 되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아, 변호사라고 다 부자가 되는 건 아니구나.’
엄마는 월급 받으면 매월 30만 원은 생활비에 보태라고 했지만, 96만 원 7천 원 중 일부는 청약통장으로, 일부는 적금으로, 일부는 실비보험으로 사라졌다. 나는 빚을 핑계로 캥거루족에 합류했다.
2017년 중반까지만 해도 집값은 ‘슬금슬금’ 오르는 정도였다. 열심히 저축하면 언젠가는 종잣돈을 모아 집 한 채는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잔인한 착시였다.
나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섰는데, 그해부터 아파트는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해 여름, 아파트 시장은 마치 불이 붙은 듯 질주했다. 투기지역 확대, 종부세 강화, 대출 규제 등 각종 대책이 하루가 멀다고 쏟아졌지만, 시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불안했고, 그 불안은 영끌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었다. 정부가 칼을 들이댈수록 시장은 이상하게 더 가열됐고, 갭투자로 집을 산 사람들은 단숨에 벼락부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안 사면 평생 못 산대.”
“영끌이라도 해야 해.”
“전세 끼고 사면 돼.”
그리고 나는 조용히 벼락 거지가 되었다. 내 마음은 점점 가난해졌다. 사회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공부해 대학에 갔고, 또 수천만 원 학비를 들여 변호사가 되었을 뿐인데 아파트는 언제나 한발 앞서 도망갔다.
뉴스에서는 말했다.
“패닉바잉은 위험하다.”
하지만 패닉바잉조차 돈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이었다. 나에게는 패닉을 살 종잣돈조차 없었다. 월급 96만 원을 악착같이 모아도, 그해 오른 집값 앞에서는 먼지 한 줌이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가도, 가까이 가려고 하면 또 멀어지는 신기루 같았다. 내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보다 아파트가 도망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렇게 나는 깨달았다.
“아파트는 내가 열심히 살아온 속도를 단 한 번도 기다려 준 적이 없었다.”
열심히 살아도 닿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 발밑의 바닥은 다시 차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