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때로 알면서도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한다. 2020년 여름, 내게도 그런 하루가 있었다. 작은고모 내외가 서울에 올라왔다. 나를 보고 싶다며 점심을 먹자고 했다. 장소는 문정동. 그때까지 잘 가지 않는 동네였는데, 그날의 약속 장소는 이상하게도 문정동이 되었다.
냉면을 먹었다. 유난히 더운 날이었고, 냉면은 평소보다 더 시원했다. 식사를 마치고 길을 건너는 순간, 코너에 자리한 오피스텔 분양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명당이었다. 수영장, 자쿠지, 헬스장, 커뮤니티 시설. 막 변호사 4년 차가 된 사람의 허영심을 정확히 겨냥한 문구들이 줄지어 적혀 있었다.
그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법원 근처 아파트들이 어떻게 지역의 대장 아파트가 되는지를. 대전의 크로바아파트, 대구의 수성구 아파트들처럼. 그리고 하필, 내가 서 있던 그 자리 맞은편에는 동부지방법원이 새로 자리잡고 있었다.
‘아, 여기 자리 괜찮다.
법원 근처는 늘 교통의 요지지.’
그 생각이 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무렵의 나는 비싸고 멋있어 보이는 것들에 괜히 마음이 가는 조금은 철없는 서른 살이었다. 변호사 4년 차. 그동안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종잣돈은 약 1억 원. 이제는 종잣돈도 모였으니 슬슬 ‘투자’라는 걸 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시기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나는 거의 홀린 사람처럼 전단지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며칠 뒤, 청담동에 있는 분양사무소에 앉아 있었다. 분양사무소 직원들이 지나치게 친절했다.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 들고 나를 맞이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양사무소라는 공간조차 낯설던 내가 그곳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이 가장 이상했다.
마치 내 안에 낯선 누군가가 살고 있었던 것처럼. 그 누군가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그 장소로 데려갔다. 그리고 나는 가계약금 2천만 원을 넣었다. 무려 12억짜리 오피스텔이었다. 그것도 방 두 개짜리. 내가 모아둔 돈보다. 계약금이 2천만 원이나 더 많았지만, 부족한 돈은 ‘변호사 마이너스 통장으로 메우면 되겠지’라는 아주 간단한 생각으로 덮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부동산을 샀다.
부동산을 사고 나면 묘한 착시에 빠진다. 내가 산 물건은 반드시 잘될 수밖에 없다는 환각. 아직 땅만 있는 상태였는데도 나는 이미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수영장, 헬스장, 조식 서비스, 발렛서비스, 호텔식 샤워룸. 이곳이라면 내 변호사로서의 삶도 괜히 더 잘 풀릴 것만 같았다.
분양사무소에 같이 갔던 친구에게 그날부터 전화가 계속 왔다.
“그 2천만 원 그냥 날렸다고 생각해. 계약서 쓰지 마. 그거 사면 너 진짜 후회해.”
착시에 빠진 사람에게 경고는 소음에 불과하다. 그때의 나는 내가 선택한 물건이니까 잘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집을 소유한 사람들에 대한 선망은, 내 안에 욕망의 고리를 만들어 냈다. 빚이 가득한 집을 갖는 일이 개인의 진짜 욕망이 될 순 없다. 그러나 서른 살에 마주한 ‘자가’라는 단어는, 계산을 무력화시키고 판단을 왜곡했다. 선망은 시기심으로, 시기심은 질투로, 질투는 '이번이 아니면 영영 못 한다'는 비이성으로 바뀌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오피스텔을 계약하게 된 이유는 결국 그 연쇄였다.
그 시절의 나에게 조금의 현실감각이 있었다면 그 신호를 더 정확히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집’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욕망의 대상이었고, 고급 오피스텔은 그 욕망에 아주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했다. 나는 집을 산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산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상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터지며 금리는 스멀스멀 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규제에도 잘 잡히지 않던 집값은 꺾였고, 시장에서 거래가 사라졌다. 팔고 싶은 사람은 늘어났지만, 사고 싶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고공 행진하던 강남의 아파트값조차 두 자릿수 하락을 넘어 30% 가까이 빠졌다는 말이 공공연했다. 부동산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개인에게는 탈출구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장면이 찾아왔다. 입주자 사전점검 날이었다.
오피스텔은 아파트처럼 사전점검이 법적으로 필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는 수준’을 갖추지 않고 준공을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현장은, 거주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건설물가 상승과 자재 수급난 속에서, 내가 꿈꾸던 고급 오피스텔은 상층부조차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점검이 진행됐다. 보도블록과 조경은 흙바닥 그대로였고, 건물 곳곳에는 건설자재가 쌓여 있었다. 뼈대만 서 있었을 뿐, 내부 마감은 시작조차 되지 않은 공간들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빌트인으로 들어오기로 했던 가전과 가구는 빈칸으로 남아 있었고, 엘리베이터 버튼 커버조차 씌워지지 않아 전선이 그대로 보였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멈춰 섰다. 하자 전문변호사로 일해온 내가, 내 집의 하자를 보고 멘탈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준공은 제때 나지 않았다. 문제는 준공이 밀리면서 잔금일정 또한 가장 최악의 시기에 걸렸다는 점이었다.
2022년 12월.
오피스텔은 물론이고 아파트 거래조차 얼어붙은 시기였다. 서초구 한 달 거래량이 세 건에 불과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은 시중 금리를 밀어 올렸고, 잔금 대출 금리는 7%에 육박했다. 제로금리에 가까웠던 시절, 아파트도 아닌 오피스텔을 덜컥 계약한 나로서는 살이 떨리는 상황이었다.
계약금을 포기하고 해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캥거루족이 되어 악착같이 모은 종잣돈 전부가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가 저지른 선택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았다. 그것이 책임감이었는지, 체면이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첫 투자 실패는 이별보다 더 아팠다. 지름길처럼 보이던 선택은, 내 욕망이 만들어낸 처절한 실패로 돌아왔다. 은행 다섯 군데를 돌았다. 가능한 신용을 모두 끌어모았다.
‘정말 안 되면, 동부지방법원 앞이니 여기서 개업이라도 하겠지’ 그런 마음으로 버텼다.
그렇게 해서 결국 잔금을 마련했다.
그 대가는 분명했다.
9억 원의 대출. 매달 500만 원에 가까운 이자.
다행히 당시의 월급으로 ‘간신히’ 버틸 수는 있었다. 선택지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시간은 더 돈이 되었으며, 삶은 눈에 띄게 얇아졌다. 월급날이면 매달 빠져나가는 이자를 계산하며 손이 떨렸다. 현실을 인정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집이 나를 구해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가장 잔인한 사실 하나.
나는 집을 산 것이 아니라, 불안을 샀다.
그때부터 질문이 시작됐다.
사람은 왜 집 앞에서 흔들리는가.
왜 어떤 순간에는 이별보다 잔금이 더 무서운가.
왜 누군가는 집 때문에 무너지고, 누군가는 집 때문에 더 냉정해지는가.
나는 이제, 그 질문을 변호사의 언어로도 답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