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나의 체형을 둥글게 만들수록 내 감정을 수시로 해부하는 나를 본다. 이전에는 얼굴에 웃음이 감돌거나 눈썹 끝이 하늘로 치솟으면 순간의 상황으로만 마음을 판단했다. 감정에 관한 다양한 글을 살피고, 개인적인 경험이 덧붙여지면서 감정은 잠깐의 사건으로만 생기는 에피소드가 아니라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진실은 상황의 앞뒤를 살펴보게 했고, 그때부터 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을 해부한다는 것은 내가 성숙해지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철이 없을 때에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다면 감정 파헤치기를 한 이후에는 화가 나다 가도 슬며시 가라앉는 경우도 많다. 덕분에 싸울 일도 멈추게 되는 때도 많아졌다. 대화 도중에 상대가 내 감정을 ‘끼긱’ 하면서 긁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순간 마음속에 ‘욱’하는 열불이 올라오다 가도, ‘저 사람이 갑자기 왜 저렇게 기분 나쁘게 말을 하지?”라는 물음표를 만들면, 불씨가 잦아들면서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연기를 피운다. 그렇게 마음을 파헤치다 보면 상대의 역린을 나도 모르게 건드렸거나 대화 도중에 상대가 질투나 자격지심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재수 없게 나온다는 것을 스스로가 모르는 것뿐이었다. 물론 혈기가 왕성 할 때에는 (지금도 그럴 때가 많지만) 상대가 말로 주먹을 날리면, 나는 뒤돌아 차기라도 할 만큼의 대립각을 세우기 일쑤였다.
이런 감정은 가족이나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무의식적으로 생긴다. 편하다 보니 상대에 대한 배려는 쪼그라들고 거름망 없는 말들이 가면을 쓰고 목구멍으로 올라와 술술 나온다. 조언의 가면을 쓴 말들은 때때로 말하기 싫은 상대의 입을 억지로 열게 만들기도 한다. 상대는 다물고 싶은 입을 의지와 상관없이 열게 되고 결국 감정은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이 되어 돼 뱉어 버린다.
침목 모임은 강산의 변화에 무뎌질 정도로 이어져 오고 있다. 오랜 시간, 열 손가락이 남을 정도로 매회 만남을 거른 적이 없는 모임이다. 옛날 어르신들 말처럼 뉘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아는 정도다. 수년을 넘게 만나 오면서 서로의 감정에 눈물을 흘려주기도 하고, 내 감정에 싸여 상대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기도 한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의 반복과 연륜이 서로의 눈치를 챙기게 만들었는지 지금은 감정의 배려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호기심으로, 질투의 마음으로 상대가 원치 않는 대화를 강요하는 말들이 쏟아지는 시간도 있다.
남편이 몰래 했던 투자가 망하면서 숙이는 남편이 싼 똥을 치우느라 10년 넘게 투잡 쓰리 잡을 했다. 10년의 고생 끝에 똥 냄새는커녕, 있는 집 냄새가 날? 정도로 지금은 여행도 다니면서 살고 있다. 대기업에 다니면서도 커피 한 잔을 사 마시지 않았던 그녀에게 지금의 여유로움은 당연한 거다. 뒤늦게 다시 출발했지만 회사에서도 인정받고 원하는 여행을 유유자적 다닐 수 있는 숙이는, 어쩌면 친구들에게는 격려와 축하 외에 질투와 부러움의 마음도 심어 주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백하자면 나 또한 그러한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니까. 문제는 그러한 마음들이 배려와 관심이라는 마스크를 쓰고 숙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얼마를 모았냐, 사놓은 집은 얼마나 올랐냐, 회사에서 받는 월급과 퇴직금은 얼마나 되느냐…. 이러한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나보다 돈이 많은지, 행복한지, 비교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이다. 그런 숙이가 이번 만남에 자신의 통장을 펼쳐 보이는 일이 생겼다. 한 친구가 숙이의 노후를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그녀의 재산 상태를 꼬치꼬치 물었다. 친구의 물음은 거의 압박 면접에 가까웠고 마음이 모질지 못한 숙이는 입에서 세부내역을 술술 쏟아냈다. 하지만 숙이의 얼굴은 자신의 입을 막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자백 아닌 자백은 우리를 집중시켰고 숙이는 집중을 해산하는 말로 모임을 끝냈다.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많지 않지? 거봐, 내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했잖아.”
그녀의 말에 우리는 침묵했다. 침묵은 잠깐이었지만 무게는 컸다.
우리는 다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간단한 농담을 하면서 헤어졌다. 나는 집으로 오는 길에 내 마음을 취조했다.
‘너도 그녀가 궁금했니?’
‘숙이는 정말 자신의 현재를 말하고 싶었을까?’
나는 숙이가 쓸개즙을 한 대접은 먹은 마음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친구는 숙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돈이 얼마나 있냐고 물어보았다는 것을 안다. 항상 친구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친구니까. 하지만 제대로 웃지도 그렇다고 화를 내지도 못하는 표정에서 그녀가 불편한 마음 일거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