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봄을 응원해

by 희정의 향기

현이 얼굴에 여유로움이 묻어있다. 저 여유로움은 뭐지. 엄마를 만날 때마다 불만도 아니요 힘든 것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숨어있는 듯한 표정이 지배적이었던 현이에게 시간적 여백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엄마, 커피 좀 사줘. 아들이랑 아늑한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싶다.'라고 말하면 생활하기도 빠듯하다고 심각했던 녀석이다. 증명이라도 하듯 무릎이 튀어나온 헐렁한 바지와 색 바랜 검정 후드티가 상징이었던 녀석이다.


설 연휴를 지나고 만난 오늘의 현이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신경 쓴 느낌이 드는 진한 검정티와 검정 바지를 입고 머리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월급이 두 배로 오를리는 없다. 로또가 당첨될 리는 더더욱 없다. 현이는 로또를 사는 돈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놈이니까. 그렇다. 여자가 생긴 거다. 얼굴과 행동에서 여유를 뿜어내는 요인에 여자 친구만큼 좋은 증거는 없으니까.


카페에 앉아서 엄마로서 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을 시작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냐, 아픈 데는 없냐, 회사는 잘 다니고 있냐.. 정작 묻고 싶은 말은 뒤로 밀리고 밀렸다. 어느 순간 테이블 앞으로 몸을 당기면서 참았던 말을 놓았다.


“여자 친구 있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당하게 긍정을 답하는 현이의 끄덕임에 두 마음이 공존했다. 우선 여자친구와 달달한 시간을 보내면서 싱그런 청춘영화를 만들어 가겠구나 하는 안도감이다. 가족과 동성 친구에게는 느끼지 못하는, 이성의 친구에게서만 느끼는 두근거림과 사랑은 옆사람도 살필 수 있는 좋은 눈치를 주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옛날 노래 가사처럼 ‘무조건 무조건’ 앞뒤 안 보고 직진하는 쾌감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마음은 연애의 실패에 대한 앞선 걱정이다. 현이가 첫사랑과 헤어진 이유를 알기에 이번 연애도 그러할까 봐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몇 년 전 처음 사귀게 된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울었던 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어느 날 갑자기 외출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더니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라고 문을 두드렸더니 생각이 없다는 목소리만 기어 나왔다. 친구와 다투었겠거니 생각하고 신경을 껐다.


며칠이 지나도 집에서 현이 얼굴을 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목소리 또한 사라졌다. 엄마의 걱정이라는 민망한 변명으로 현이 방에 조용히 귀를 대 보았다. 적막을 너머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온갖 잡다한 생각이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싸웠는지, 사기당했는지, 직장에서 잘렸는지. 그때 현이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벨소리가 두 번 울리기 전에 응, 하고 대답하는 소리, 그리고 알았다는 말과 함께 번개처럼 방에서 뛰쳐나와 현관문을 부술 듯 열고 달렸던 현이. 걱정은 놀람으로 바뀌었다.


1시간이 지났을까. 띠릭띠릭 현관 비밀번호를 차분하게 누루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스르륵 열렸다. 현이였다. 서 있을 힘조차 없다는 듯한 걸음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뒤를 따라서 조용히 물었다.


“무슨 일인지 엄마한테 말해주면 안 될까?”


상황은 이랬다.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카톡에 있는 자신의 사진을 지워달라고 말하려고 만나자고 했던 거다. 침묵과 함께 현이의 손을 잡았다. 현이의 감정을 오롯이 공감해야 어떤 말이라도 해 줄텐데 내가 지금 현이에게 공감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먼저 생겼다. 나는 그때 어땠지? 그래도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되었다.


“많이 힘들 거야. 엄마도 그랬으니까. 원래 첫사랑은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하잖아. 시간이 지나면 좋은 추억으로 남기도하고 더 좋은 사람도 만날 수 있을 거야.”


구태의연한 말이다. 하지만 경험이고 내가 구태의연한 사람이니 어쩌랴.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알게 된 사실은 이별의 원인은 현이의 당시 상황이었다. 좋은 직장을 잡은 여자친구와는 다르게 불안정한 직업에 따른 보이지 않는 미래, 넉넉하지 않은 경제 여건, 엄마와 둘이 사는 삶은 그녀에게는 헤어질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욕하자는 건 아니다. 내가 딸 가진 부모라도 지금 같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경제적 여건이 부족한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라 하지 않았을 것 같다.


엄마, 아버지의 출퇴근 만으로 삼대의 삶이 유지되었던 시절, 지금은 유물이 된 시대다. 경제적 조건을 앞장 세워야 하는 시대에 연애를 시작했으니 현이가 이뻐 보이기도 하지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거다.


다리를 꼬고 편한 숨을 쉬면서 커피를 마시는 현이를 보니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해 주고 싶은 말이 많다. 유명한 철학자, 부자들이 했던 말이라며 주저리주저리 가스라이팅 하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내 욕심일 뿐이다. 연애의 끝은 현이가 만드는 것이기에. 그 끝에 새로운 길이 생길 수도 있고 다른 끝으로 마무리가 될 수도 있다.


“엄마는 현이가 연애를 통해서 사랑도 배우고 사람도 배웠으면 좋겠다.”


줄줄이 넘어오려는 말을 삼키느라 힘들었다. 현이는 말없이 고객을 끄덕였고, 그런 현이가 고마웠다.

봄이 온 것처럼 현이의 시간에 봄이 왔다. 나는 그저 바라본다. 그의 봄을 가만히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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