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연애라는 사탕을 입에 물기 시작한 현이를 보면서 시선은 나의 내부로 향한다. 그나저나 나의 첫사랑은 언제였지?
탐스럽던 목련꽃들이 순식간에 봄바람에 떨어지며 빛바랜 장면이 돌기 시작한다.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이 커피가 놓인 테이블을 아스라이 비친다. 커피잔에서 아직 식지 않은 기운이 올라온다.
그건 첫사랑이 아니었지. 풋사랑이었지.
산을 가다 보면 파도치는 나뭇잎들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는 나무들, 모양과 색은 달라도 조잘대는 꽃들 천지다. 같지만 다른 모습들을 보자면 유난히 눈에 띄는 나무나 꽃이 있다. 다른 나무들을 보호해 주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나무, 왠지 강단 있어 보이는 보라색 꽃. 회사에서 부딪히는 사람들도 그렇다. 모두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느낌, 다른 사람. 비슷한 슈트, 비슷한 머리 스타일,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을 담고 있는 사람들.
박대리도 그런 사람이었다. 20대 회사를 다니면서 가끔 마주쳤던 다른 부서의 박대리는 성씨 그대로 박대리였다. 다만 하회탈처럼 잘 웃는 얼굴로 누구를 보나 인사를 잘하니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대부분은 긍정의 고개를 끄덕였다.
박대리의 하회탈에 처음 호감이 갔던 때가 언제였던가. 아마 엘리베이터 안이었을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다시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누군가 나보다 1초 빨리 열림 버튼을 눌렀나 보다. 문이 윙 소리와 함께 열리면서 1층 로비에 서 있던 하회탈 얼굴. 그리고1층 현관문을 통과해서 그가 서있는 뒤쪽을 감싸는 빛이 그의 탈에 만화영화 같은 장면을 만든다.
“안녕. 희주 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는 박대리에게 더듬는 말투로 인사를 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거기까지였다. 그런 줄 알았다.
업무적으로 부딪힐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박대리를 바라보는 마음은 이후 간질간질 새순이 돋고 있었다. 새순은 도도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문이 열리고 그의 모습이 보이면 목을 치켜들고 목례만 깔딱하면서 손가락은 닫힘 문을 맹렬히 눌렀다. 찬바람을 쌩쌩 일으키면서 냉기를 돌게 했어야 했다.
“김희주 씨 안녕, 희주 씨 몸이 안 좋은가? 얼굴이 굳어있네.”
복도에서 마주친 그의 갑작스러운 안부에 나는 버벅거렸다. 찬바람을 뚫고 들어온 햇볕에 젓은 모래로 지은 모래성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이후 만날 때마다 나누는 가벼운 인사에도 나는 얼굴로 피가 몰리곤 했다. 출근 때마다 거울을 수십 번 들여다보면서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입술을 빨갛게 할지 분홍으로 할지 고민했다. 신발굽도 거의 없는 신발을 사서 신고 다녔다. 휴일이면 월요일 출근이 기다려졌다.
반면, 박대리가 인사를 할 때마다 내 목소리는 모깃소리로 바뀌었다. 이런 나의 극적 아이러니는 더듬이 안테나를 세우고 다니는 가장 친한 언니의 레이다에 걸렸다.
"희주야, 너 박대리 좋아하니? 박대리만 보면 볼이 빨개져. 큭큭큭"
얼굴은 벌게졌지만 손은 부정을 흔들면서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혼자만의 비밀은 얼마 안 가서 원맨쇼이자 잠시 피고 지는 목련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선배언니와 가깝게 지냈던 나는 가끔 주말에 언니 집에서 밤을 낮 삼아 이야기를 하곤 했다. 김대리는 아부쟁이. 큰언니는 순둥이, 부장님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기 싫다는 둥의 이야기였다. 서로 회사 사람들의 흉보기로 깔깔대고 웃던 시간들은 언니와 나의 동지애를 만들었다.
한참의 수다 후 저절로 감기는 눈과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잠 속에서 헤엄치려는 순간 언니의 한 마디는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마냥 정신이 화들짝 들었다.
"희주야. 나 박대리 하고 사귀고 있어."
순간 숨이 멈추었고 시간도 멈추었다. 뭐라도 말을 해야 했다. 먼저, 숨을 내뱉을 때 소리 나지 않도록 입으로 최대한 조금씩 내뱉었다. 침 넘기는 소리가 날까 봐 최대한 조용히 삼켰다. 그리고 아랫배부터 끌어올린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잘 됐다. 언니~ 박대리님 너무 괜찮은 사람이잖아. 정말 잘 됐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목소리가 떨릴까 봐 목에 힘을 주었다. 언니의 연애를 응원해 주어야 했다. 진심으로 기분 좋은 목소리로 언니를 응원해 주어야 했다. 그런 나에게 언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박대리 좋아하지 않아?”
“어휴~ 그냥 회사 사람으로 괜찮다는 거지. 나는 우선 키가 나보다 커야 해. 알겠지?”
방정맞은 목소리로 언니의 연애를 잠시 더 응원하고 잠을 청했지만 눈은 말똥말똥했다. 언니는 옆에서 안정적인 호흡을 하고 있었다.
출근 옷차림에 더 이상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9시까지 출근 도장을 찍어야 한다는 의무감만이 출근을 서두르게 했다. 붐비는 버스 안이 짜증을 유발했다.
드라마에서 첫사랑에게 차이고 실연당한 여자가 커리어우먼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생각이 성숙해지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는구나라고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았다. 잠재의식은 외면적으로 나를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살짝 미소만 짓는 얼굴,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것 같은 시크한 말투를 섞어서 하는 행동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처럼 성숙한 여자어른이 되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했다. 실연당했으니 나는 어른이다라고 혼자서 단정 지었다. 말 그대로 혼자 단정이었다. 그렇게 다시 시간은 흘렀다.
진부하고 평범한 시간들은 나를 이전의 20대 초반의 여직원 자리에 다시 갖다 놓았다. 성숙해진 것도 아니요, 어른의 문에 한 걸음 다가가지도 않은 채 말이다. 풋사랑은 만개했나 싶더니 하루아침에 통째로 떨어지는 목련꽃이었다. 나무도 그대로였다.
한철 꽃이 진다고 큰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숙한 나무는 한철로 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