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의 방

by 희정의 향기

집에 물건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빈 공간이 주는 풍요로움이 있다. 웬만한 물건들은 서랍에 정리해서 넣거나 짐을 놓는 방에 옮겨 놓는다. 거실에는 내가 좋아하는 면으로 된 체크무늬의 연한 녹색의 커튼을 달았다. 바람이 창문으로 들어올 때마다 살랑거리는 커튼을 보는 것만으로 삶이 만족스럽다.


한 쪽벽에 놓여있는 소파 하나 그리고 빈 공간, 또 다른 벽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티브이와 빈 공간, 거실창 옆에 자리 잡은 책장, 책상, 그리고 여백의 공간.


가난하면서 가난을 몰랐다. 산다는 건 내가 경험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의 테두리 안이 전부였다. 여러 집이 한 수돗가를 썼다. 어쩌다 일을 다니는 남편과 늙은 어머니, 눈에 멍이 떠날 새가 없는 아내가 사는 오른쪽 집, 회사를 다니는 이십 대 큰딸과 놀고먹는 이십 대 아들, 그리고 학교 다니는 둘째와 노점상을 하는 엄마가 사는 왼쪽 집. 나에게 그 모습들은 당연했다.


등나무 덩굴이 우거져 그늘이 만들어진 의자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경이는 말이 없었다.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입을 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이 와서 말을 걸지 않는 한. 키가 나보다 컸던 경이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 우리는 안녕이라는 두 글자로 두꺼운 벽은 허물었지만 안부 미소를 짓는 것 까지였다.


경이는 하교 후에 반 친구들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해도 집에 가서 할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경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궁금했다. 떡볶이에 초연한, 책을 읽는 모습이 매력적인, 항상 단정한 그녀.


어느 날이었다. 집에 가는 길이 같았던 나는 앞서 가고 있는 경이의 팔짱을 끼면서 옆에 찰싹 붙었다.


"같이 가자. 집으로 가는 거야?"


경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으로 나를 반겼다. 나는 그녀 옆에서 나와는 다른 아늑한 향기를 맡았다. 그렇게 그녀와 친해지기 위한 첫날이 지났다. 이후 나는 하굣길마다 그녀 옆에서 걸음을 맞추었다. 읽고 있는 책 제목이 뭐냐, 집에 가면 뭐 하냐, 엄마는 집에 계시냐...... 그녀의 향기가 몹시 궁금했다.


“희주야. 우리 집에 갈래?”


기회가 왔다. 그녀가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엄마가 떡볶이를 해 놓았다고 하면서 함께 가서 먹자고 했다. 경이의 초대에 난 가도 되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궁금증이 눈앞에서 해결되는 날이었다. 무엇보다 친구 엄마가 만든 떡볶이를 먹을 수 있다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상황에 설레었다.


설렘은 걱정으로 바뀌었다. 경이 어머니를 보면 어떤 목소리로 인사해야 하는지, 앉을 때에는 어떻게 앉아야 예의 바르게 앉는 것인지, 말을 할 때에는 어떤 목소리를 내야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는 소리를 들을지 고민하느라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그녀 집 문 앞에 도착했다. 집 대문을 보고 내 몸이 왜소해지는 것 같았다. 정갈하고 깨끗한 흰색 벽돌의 2층 집의 큰 검정색 철문이 있는 그녀의 집은 내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곳이었다. 잠깐 몸이 굳었고 망설여졌다. 마음속은 혼란스러웠지만 꽁꽁 숨기고 그녀를 따라서 대문을 넘었다.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이 만들어주는 조그마한 마당길을 지나 거실로 들어가는 녹색 문을 여니 그녀의 엄마가 웃으며 반겨 주셨다. 그녀 엄마가 입고 있는 꽃무늬가 그려진 노란색 앞치마가 보였다.


"엄마, 같은 반 친구 희주야.~"


경이의 엄마는 탤런트 같았다. 매일 가게일로 집안일로 하루하루를 전투하듯이 사는 나의 엄마 모습이 아닌, 티브이 드라마에 나오는 여유로운 미소가 얼굴에 가득한 부잣집 가정주부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 또한 그러한 집을 방문한 사람답게 드라마에서 보았던 조신한 모습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흥분된 소리를 최대한 숨기고 경이처럼 가녀린 목소리를 냈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양말을 확인했고 안도했다. 그리고 사뿐사뿐 걸음으로 숨소리도 없이 경이의 방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방으로 가면서 눈은 거실의 모든 것을 담기에 바빴다. 커다랗고 무게 있는 밤색 소파, 나뭇결이 살아있는 진짜 나무목재로 붙인 벽, 그 벽에 붙어있는 웃고 있는 가족사진. 커다란 거실 창에 달려있는 살랑거리는 하얀 커튼까지. 자꾸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려고 애썼다.



한 방에서 온 가족이 살던 우리 방보다 더 큰 그녀의 방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360도 돌려대면서 모든 것을 훑었다. 인형, 책상, 책, 옷장, 분홍 커튼....


"경이야. 너희 집 부자구나......"

"모가 부자야.~ 아니야.~"


중얼거리듯 나온 말에 경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면서 말했다. 처음 방문한 친구집이었다. 곁눈질로 티 나지 않게 경이가 하는 모습들을 보고 따라 했다. 다리를 모으고 옆으로 앉는 모습, 가방을 책상에 가만히 놓는 모습, 친절함이 묻어난 목소리의 부드러움. 다행히 어색함을 숨길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엄마가 노란 쟁반에 떡볶이와 오렌지 주스 2잔을 가지고 와서 바닥에 놓아주셨다.


"많이 먹고 놀다가.~"


내 집이라면 누가 먹기라도 할까 봐 떡을 두세 개씩 집어서 입에 넣고 또 넣었을 텐데 여기는 경이의 집이다. 경이가 떡을 하나 집어서 입에 떡의 반을 넣으면 나도 조심스럽게 떡을 포크로 집어서 떡의 반을 입에 넣고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먹었다.


경이는 책을 보자면서 한편에 있는 책장에서 책을 꺼내 반이 접힌 책 중간 페이지를 펼쳐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의 책장 앞에 섰다. 어떤 책을 읽을지 망설여졌다. 가장 고상하게 느껴지는 제목의 책을 집었다. 떡볶이 쟁반 앞에 앉아서 책을 펼쳤지만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책 넘기는 소리만이 귀에 들어왔다.


그녀의 떡볶이 먹는 속도는 슬로비디오 돌아가는 속도보다 느렸다. 내 집에서 혼자 먹었다면 5분이면 다 먹고도 남았을 양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책장을 넘기면서 떡 하나를 세 번에 나누어 입에 넣었다. 결국 그날 나는 떡볶이를 다 먹지 못했고 오렌지 주스도 절반을 남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과 가슴속이 평상시와 달랐다. 마음이 답답하면서도 허전했다.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했다. 나는 감정의 제목을 모른 채 집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자 잠을 자는 방이자 거실이자 밥을 먹는 공간이 있었다. 방 한편에 있는 작은 옷장, 그 옆에 있는 책장 겸 책상, 오른쪽 벽에 붙어 있는 티브이, 그리로 서랍장, 벽에 걸려 있는 가족들의 옷가지, 보이지 않는 빈 벽......


나는 방구석에 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경이방이 생각났다. 다른 세계의 방.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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