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눈으로 보는 세상

by 희정의 향기

글씨에 초점이 맞지 않는다. 머리가 어지럽고 글자가 빙글빙글 돈다. 시계를 보니 큰 바늘이 두 바퀴를 돌고 반바퀴를 더 돌아있다. 목과 어깨가 뻐근하다. 스트레칭을 언제 했더라.


보던 책 페이지 반을 접어 덮는데 갑자기 며칠 전 기억이 떠오른다.


'투기과열지구로 서울이 묶여 있다고 하는데 제재를 받는 내용이 뭐였지?'


책을 왼쪽 옆으로 미루어 놓고 오른쪽에 뒤집어 놓은 핸드폰을 집어든다. '투기과열지구'라고 입력을 하고 에이아이한테 문자를 보낸다. 드르르륵, 1초 만에 답이 뜬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에이아이가 보여주는 기사를 읽는다.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접어 놓았던 책 페이지를 펼쳐서 다시 읽어 나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무언가 생각나는 의문이 있다. 다시 핸드폰을 짚는다. 에이아이에게 질문을 하고 다시 답을 받는다. 다시 책을 집어 든다. 눈이 뻑뻑해진다. 책과 핸드폰을 번갈아 보면서 눈에게 쉴 시간을 주지 않자 눈이 심뽀가 났는지 뜨고 감기도 힘들 정도로 나에게 고통을 준다.


눈은 마음의 창이요 눈이 맑고 좋아야 살아 움직이는 자연과 하루하루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글로 남길 수 있으니 잘 다독거려서 함께 나이 들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런 상태로는 어림없다. 이러다가 책을 보기 힘들어질 정도로 눈이 수명을 다 하는 것이 가장 두렵다.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릴 때 책을 보기 위해서 안경을 쓴다. 50살에 이미 찾아온 노안은 초등학교 때 그토록 부러워하던 안경을 기어코 쓰게 만들었다.


안경을 쓰 사람들을 보면 왠지 똑똑해 보이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이런 착각은 초등학교 때부터였을 거다.


같은 반 반장은 3학년 때부터 6학년까지 계속 같은 반으로 올라갔던 여학생이다. 뽀얀 얼굴에 항상 집에서 일하는 언니가 학교 앞까지 가방을 들고 바래다주었고, 수업이 끝날 시간에 맞추어서 교문 앞에서 반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가방을 받아서 함께 집으로 갔다. 똑 부러지는 말투와 자주 선생님을 방문하는 반장의 엄마와 반장의 공통점은 안경이었다. 어린 나는 당시에 안경을 쓰는 모습이 부러웠다. 안경을 쓰고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반장의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 더군다나 학교에 올 때마다 안경을 끼고 원피스를 입고 오시는 그녀의 엄마는 유명 연예인 같은 모습에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냄으로써 나는 안경을 끼면 반장 엄마 같은 사람으로, 반장처럼 보일 거라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에서 티브이를 볼 때 얼굴을 티브이 화면에 최대한 들이대고 보는 거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브이 앞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눈도 자주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다 뒤통수로 들려오는 아버지의 호통에 입을 삐죽이 내밀고 물러 앉기를 반복하곤 했다.


"텔레비전을 혼자 보니? 그 앞에 있으면 다른 사람들은 어떡하라고 그리 앉아서 보면 어떻게."


당시 내가 눈을 혹사시킬 수 있는 방법은 티브이를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것 밖에 없었느니 주야장천 시간이 되는 대로 화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을 마구마구 비벼대면서 엄마를 찾았다.


"엄마, 나 글자가 잘 안 보이는 것 같아."


"그렇게 텔레비전을 앞에서 보니까 그렇지. 앞으로는 앞에서 보면 정말 혼난다."


그게 다였다. 나는 엄마에게 증거를 들이대기 위해서 책을 가져다 보았다. 아까 잘 안 보인다고 생각했던 글자들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책에 묻은 까만 먼지까지 보였다. 한숨이 나왔다.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학교 신체검사시간이었다. 그날이 내가 그동안 바라던 안경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날이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키와 몸무게, 청력을 재고 시력을 재는 순서가 되었다. 숟가락으로 왼쪽 눈을 가리고 나머지 오른쪽 눈으로 칠판에 있는 숫자를 읽으면 되는 거였다. 나는 누가 봐도 확실한 숫자만 말했다.


"5, 3, 나, 비행기"

"1.2 바꿔서"

"3, 7, 동그라미, 9...."

'1.2"


그렇게 안경의 꿈은 다시 사라졌다.


같은 반 앞자리에 있는 친구도 안경을 쓰고 있었다. 통통한 볼에 치아 교정을 하고 있던 그녀가 쓰고 있던 안경을 쓰고 나도 똑똑해 보이고 싶었다.


"미정아, 너 안경 한 번 써볼게. 내가 요즘 눈이 나빠진 것 같아."

"안경은 도수가 맞아야 하는데 한 번 써봐."


도수가 맞아야 한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말의 의미도 몰랐다. 미정이가 주는 안경을 두근거리며 손으로 건네받았다. 살며시 내 눈에 씌운 순간, 안경 속으로 미정이 얼굴이 울퉁불퉁 일그러져 뿌옇게 보였다. 교실이 볼록해 보였다. 그리고 눈이 아파왔다. 나는 얼른 안경을 벗어서 미정이에게 건네주었다.


"도수가 안 맞아서 그런 거야. "


안경을 벗고도 속이 좋지 않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하지만 속이 좋지 않았던 것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도 내 마음의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쓰고 싶어 안달이었던 안경을 몇 년 전부터 노안으로 쓰고 있다. 평상시에는 쓰지 않다가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볼 때, 작은 글씨를 볼 때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나의 제2의 눈이 되었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다 똑똑하다는 환상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증거는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얼마 전 안경을 새로 맞추었다. 썼다 벗기가 번거롭고 필요할 때마다 가방에서 꺼내어 안경을 쓰는 것도 귀찮아서 다초점 안경으로 바꾸었다. 평상시에도 쓸 수 있는 안경이라는 말에 단번에 시력 검사를 하고 안경을 맞추었다. 며칠 후 찾아온 안경은 내가 안경 가게에서 잠시 썼던 기분과는 달랐다. 안경의 중심에서 벗어난 세상은 흐릿했다. 마치 안경이 보여주고 싶은 세상만 또렷이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안경점에서는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처음이라서 그런다고 했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지금 다초점 안경을 쓴 것처럼 세상을 보는 눈도 그러한 거인지 하는 두려움 말이다.


가까이 있던 멀리 있던 모든 사물을 편하게 볼 수 있기를. 중심이 아닌 옆을 봐도 편협하지 않고 또렷하게 보이는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새로 맞춘 안경이 도와주기를 바란다.


새롭게 무언가를 하려면 새롭게 조각을 맞추듯이 해야 하는 부분들이 생긴다. 나는 지금 안경이라는 조각을 나에게 맞추는 중이다.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활자를 접하고 세상을 접하기 위해서 말이다. 좁아지는 시야를 다시 넓히기 위한 새로운 물건에 적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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