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0대 ERP 전문가다. 17년 동안 기업 특히 대기업의 ERP를 설계/구축/운영하는 일을 해왔다.
24년 12월, 계엄이 터졌다. 나라가 많이 어지러웠고, 뉴스를 보면서 생각했다.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진짜 각자도생이다. 그러면 나는 뭘 할 수 있지?
그때 바이브코딩이라는 걸 알게 됐다. 커서(Cursor)라는 AI 코딩 도구였는데, 코드를 직접 치는 게 아니라 AI한테 "이걸 만들어줘"라고 말하면 만들어주는 거였다. 25년 2월, 시작했다. 쇼핑몰을 만들어봤다. 85% 정도 완성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일반적인 프로그래밍으로 대체가 가능한 거라고, AI시대 선진적인 아이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은 뭐지? AI시대 선진적으로 구현 할 수 있는건 뭘까? 그랬더니 자연스럽게 답이 나왔다. AI가 회계 전표를 자동으로 쳐주는 ERP를 만들면 어떨까. 사람은 승인만 하면 되는 시스템. 나는 업무 프로세스 설계, 프론트엔드, DB 설계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자바나 스크립트 같은 코딩을 하거나 AI를 접목하는 건 해본 적 없었다. 그래서 이 모든 걸 AI한테 물어보면서 진행했다.
25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정말 매일 새벽 3시까지 만들었다. 나에게도 아직 이런 열정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일반 AI API가 아니라 기업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Google Vertex AI를 선택했다. 나중에 다른 AI로 바꿀 수 있도록 추상화 구조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커서(Cursor)로 바이브코딩을 했다. 작업 명세를 정말 작은 단위로 세분화해서 넣어야 했다. 큰 프로그램을 한 번에 만들 수는 없었다. 작은 단위를 하나씩 만들고, 하나하나 테스트하고, 안 되면 AI한테 물어보면서 해결해 나갔다.
그런데 내가 처음 바이브 코딩했을 때부터 12개월 동안, 바이브코딩 자체가 진화했다.
클로드 코드(Claude Code)가 나왔다. 터미널에서 AI가 직접 코딩하는 도구였는데, 처음에는 터미널에서 실행하는 거라서 뭔가 없어 보이고 어렵다고 느꼈다. 적응이 되니 커서보다 훨씬 편했다. 왜 찐 개발자들이 터미널에서 코딩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바이브코딩에는 문제가 많았다. AI가 만든 코드가 다른 코드를 부수기도 했고, 전체 맥락을 이해 못 해서 엉뚱한 방향으로 가기도 했다.
그런데 AI 모델이 새로 발표될 때마다 코딩 역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체감이 됐다. 한 달 전에 못 하던 걸 새 모델은 해냈다. 그리고 안티그래비티(Antigravity)가 나왔다. 제미나이와 오퍼스를 번갈아가면서 코딩하는데, 초기 커서 시절과는 차원이 달랐다. 처음에는 한 줄 한 줄 시키던 것을 이제는 기능 단위로 던지면 알아서 만들어냈다.
나는 바이브코딩의 역사를 통째로 경험한 셈이다. 25년 초의 "한 줄씩 시켜야 하는 시대"에서 불과 몇 달 만에 "기능을 던지면 만들어주는 시대"로 넘어가는 걸 몸으로 체감했다. 그리고 그 속도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렇게 8개월을 만들었다.
근데 만드는 내내 두려웠다.
"내가 만들고 있는 이 시스템이 AI가 발전하면서 대체되지는 않을까."
이 생각이 항상 머릿속에 있었다. 그래서 매번 확인했다. AI한테 시장 동향을 물어보고, 경쟁사를 분석하고, 내 시스템이 아직 쓸모가 있는지를 끊임없이 검증받았다. 확인할 때마다 "아직 괜찮다"는 답을 받았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만들면서 첫 번째 벽에 부딪혔다.
AI가 전표를 자동으로 쳐주는 건 좋은데, 작은 기업은 세무사한테 기장을 맡겨버리면 그만이었다. 내가 만든 시스템을 쓸 이유가 없는 거다. "이걸 누가 쓰지?"를 찾는 게 가장 어려웠다.
그래서 피벗 했다. 재무회계가 아니라 관리회계. 세무사가 해주는 장부 정리가 아니라, 대표가 지금 당장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실시간 경영 데이터. 실시간 손익, 스마트 자금관리, 자금 리스크 예측. 이걸로 방향을 틀었다.
법인도 냈다. SaaS 서비스로 출시할 계획이었다. 정부 지원 사업도 신청했다.
그리고 오픈클로가 나왔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세부 내용을 알기 전에, 이미 느낌이 왔다. 메타인지라고 해야 하나. 내가 8개월 동안 만든 것들이 이미 쓸모없어졌다는 감각. 허탈했다. 당시 초기창업패키지를 접수한 상태라 더 이상 개발은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미 끝났다는 느낌이 크게 들었다.
초기창업패키지는 서류 탈락했다.
오픈클로가 출시되고 2주 만에, 집에 처박혀 있던 2012년 맥북에어를 꺼냈다.
오픈클로를 설치해 봤다. 그리고 확인했다. 역시나 프론트엔드는 이제 필요 없다. AI가 알아서 만든다. 내가 8개월 동안 공들인 화면 설계, UI/UX, 사용을 위한 실행조작 — 그런 건 이제 의미가 없는 시대가 온 거다.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근데 나는 2012년 맥북을 꺼낸 사람이다. 8개월짜리 시스템이 끝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나를 끝낸 기술을 직접 깔아서 확인해 보는 사람이다.
오픈클로로 주식 분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AI가 검증하고 텔레그램으로 보고하는 구조. 1주 만에 만들었다. 예전이었으면 몇 달 걸렸을 일이다.
단타용으로는 승률이 괜찮은 것 같다. 스윙으로도 괜찮도록 계속 개선하고 있다.
지금은 맥스튜디오 128GB를 사서 로컬 LLM을 돌리고 있다. 24시간 365일 돌아가는 AI 환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일 생각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AI로 뭔가를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만드는 순간 이미 구시대적인 서비스가 된다. 불과 2달 전에 만든 것들이 산유물이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이제는 만드는 게 아니라, 이 흐름을 읽고 먼저 준비하는 게 살아남는 길이다.
17년 ERP 전문가의 경험은 끝나가고 있다. 하지만 AI와 12개월을 싸운 경험은 이제 시작이다. 나는 그 교차점에 서 있다.
이 글은 그 교차점에서 보내는 첫 번째 기록이다.
ZeroInput — AI 시대의 경계에서 직접 부딪혀본 것들을 기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