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름 Aug 08. 2024

이런 수박. 회사에서 수박 같은 소리하네

관리자와 직원들의 동상이몽

모든 걸 태워버릴 듯 이글이글 뜨거운 여름. 회사 익명게시판이 불타오른다. 직원들 간의 투명한 소통과 선제적인 어쩌구를 위해 만들었다는 익명 게시판. 에이. 알 만한 사람들끼리 왜 이래. 솔직히 말해보자구. 직장인들이라면 다 안다는 그 익명소통 앱. 거기에서 우리 회사 얘기가 자꾸 퍼져나가는데 그것 때문에 애먼 사람들이 곤란해지니까 남들 다 보는 데서 그러지 말고 집 안에서 해결하라는 거잖아. 뭐 공공기관이라 여기저기 이슈돼서 좋을 것도 없고 허위사실로 피본 적도 있으니까. 나름 좋은 수이긴 해.


내가 이 게시판의 존재에 대해 말했을 때 다른 회사에 근무 중인 주변인들은 의심부터 하기 시작했다. 정말 익명이야? 그래 놓고 나중에 해코지당하는 거 아니야? 아이디가 보이긴 하는데 랜덤으로 부여된 거라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어. 물론 그 시스템을 담당하는 전산팀은 알 수도 있지만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지 뭐. 그래서 난 쓰냐고? 아니. 담당자에겐 미안하지만 난 회사 말 안 믿거든. 난 메신저에서 남 얘기도 함부로 안 하는 사람이야. 사건 터졌을 때 그거 검색하는 거 뭐 일이겠어? 흥! 내가 이렇게 불신쟁이가 된 건 다 회사 탓이라구.


무슨 글이 올라오냐고? 어찌 된 게 익명 커뮤니티들은 다 비슷한가 봐. 가면 갈수록 본래 의도와 정반대로 흘러가는 것 같아. 내용에 이름만 없다 뿐이지 아는 사람은 다 알아볼 수 있는 저격글. 다른 회사는 이거 있는데 우리는 왜 없냐 이거 불편하다 저거 불편하다 따져대는 프로 불편러 글. 노골적으로 노린 듯한 갈등 조장글까지. 거기 있는 아이디들도 맨날 비슷해. 화 많은 키보드 워리어들의 싸움터지. 그래서 업무가 바쁘기도 하고 가끔 이상한 글 보면 내가 저런 사람과 같은 직장에 있다는 사실에 현타가 와서 잘 안 들어가. 아 근데 어차피 안 봐도 좀 있으면 사람들이 다 알려줘. 키키. 뭔지 알지? 누구 때문에 쓴 건지 요약정리까지 해준다니까? 웃겨 진짜.


그래서 오늘은 또 무슨 일이래? 관리자부터 직원들까지 여기저기 쑥덕거리는 소리에 결국 참지 못하고 옆자리 짝꿍에게 질문을 던진다. '모르셨어요?' 눈을 반짝이는 나의 짹짹이 대리님. 내가 직접 글을 볼 수도 있지만 이 대리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거든. 맨날 뭐 재밌다고 알려주는데 그 설명이 진짜 사람을 홀린다니까? 그렇게 잔뜩 기대한 채로 도전한 대리님의 추천템은 언제나 항상 기대보다 별로였다. 뭐 나쁘지는 않은데 뭐랄까 그냥 대리님이 말해주는 게 더 재밌어. 그 유명한 영화 소개 프로그램 딱 그거 같은 느낌이지. 대리님이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에 안 빠지고 우리 회사에 들어와 준 게 다행이라니까. 세계평화를 위해 여기 내 옆에 쭉 봉인해둬야 해.




아 수박!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제 사내 게시판에 공지사항이 떴다. 기관장님께서 이 더운 폭염 속에 지친 직원들을 위해 친히 사비로 수박을 사서 돌릴 계획이니 각 부서에서는 모레 정해진 시간까지 1층 로비로 카트를 끌고 오라는 내용. 에효오 왜 이러는 거야. 그래 감사한 일이지. 무려 사비라잖아. 근데 왜 하필 수박이냐고. 그 무거운 걸 한 통도 아니고 각 부서당 무려 3통씩이나 나눠줘 버리면 그 수박을 나르고 닦고 썰고 나눠서 먹이고 치우고 버리는 건 누가 하겠냐고. 안타깝다 진짜. 그냥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같은 거 사줄 수도 있잖아.


으휴. 이런 동상이몽을 보면 진심으로 속상한 기분이 든다. 돈은 돈대로 쓰고 오히려 직원들한테 민심만 잃고 이게 뭐 하는 거야. 주변에 비서실이나 다른 윗분들이 말 좀 해주지. 산전수전 다 겪은 양반들이 그 정도 눈치도 없이 거기까지 승진하지는 않았을 거잖아. 아 설마 일부러 엿 먹으라고 그랬나? 아니면 괜히 바른 소리 했다가 미운털 박힐까 봐 그런 걸까? 아이고 암만 그래도 그렇지 수박이라니 아이고오. 이 동네 특산품도 아니고 그게 뭐야. 막내도 아닌 내 머리가 다 지끈거렸는데 역시나 참지 못한 누군가가 익명 글로 분노의 펀치를 날린 것이다


부장이 벌써부터 너 내일 고생 좀 하겠다며 나를 비웃더라. 나도 집에서 귀한 자식이다. 내가 이런 일 하러 여기 온 줄 아냐. 선배들이 대놓고 남일처럼 여기는 게 불쾌하다. 누가 고생을 하든 말든 공짜 수박 먹을 생각에 신이 난 상사들이 대단히 실망스럽다. 어떻게 이런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임원실에서 낼 수가 있냐. 기관장은 남이 썰어주는 수박만 드셔보셔서 우리 같은 노비들 마음을 알리가 없다. 어우 진짜 신랄하네. 거기에 당연스럽게 따라오는 선배들의 지적과 라떼 반격까지. 어마어마한 조회수와 수백 개의 댓글들에 회사가 뒤집어지고도 남지.


신입 시절 여름이 정말 싫었다. 도대체 왜 자꾸 사무실에 과일이 생기는거야. 컵과일도 아니고 박스채로 껍질 과일을 갖다주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그렇게 좋아하던 과일인데 회사에서 만나면 빌런이 따로 없었다. 종류도 가지가지. 귤은 완전 땡큐고 포도는 그나마 양심적이지. 구석구석 물로 씻어서 먹으면 되니까. 사과, 배, 복숭아 아주 다들 가지가지하더라고. 탕비실에 식칼이랑 도마가 왜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알게 되네. 그렇게 싫은데 왜 깎았냐고? 그 분위기 알잖아. 과도는 하나뿐이고 누군가가 나서서 저걸 다 손질해야 함께 나눠먹을 수 있는데 다들 가만히 앉아서 서로를 흘끔거리는 그 숨 막히는 시간. 으으. 제가 할게요. 터덜터덜.


그간 만난 과일 중 최고의 보스몹은 바로 복숭아였다. 좁아터진 화장실 세면대에서 복숭아 한 상자를 꾸역꾸역 씻고나니 오늘 아침 곱게 차려입고 온 원피스는 앞치마 꼴이 났고. 테이블에 앉아서 깎기 시작하는데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얄미운 녀석들. 이래서 오늘 안에 먹을 수 있겠냐느니 껍질에 살이 잔뜩 붙어있다느니. 입만 나불거리는 시어머니들의 회초리가 이어졌다. 저기요. 저 지금 칼 들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아르르르르. 한 상자를 오롯이 까고나니 곱아버린 손가락. 마우스도 못 쥘 정도로 얼얼하더라고. 그래서 이번 막내들의 반란이 남일 같지가 않다.




오후가 되자 새로운 공지가 떴다. 하! 기가 차네. 특별 이벤트로 내일 배급되는 수박은 부장들이 썰어서 직원들과 사이좋게 나눠먹으란다. 기관장님이 직접 하사하신 오더니까 반드시 준수하라는 어명. 그래. MZ 직원은 무섭고 관리자들은 내 손바닥 안이니까 안 무섭다 이거지. 저렇게 공지까지 띄워버리면 부장이 안 한다고 발뺌해도 팀장이라도 나설 것이다. 직원이 수박 썬다고 돌아다니는 거 남들이 보기라도 해 봐. 소문을 제일 무서워하는 게 상사들이거든. 한번 승진해 보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기 마련이니까. 아 물론 또라이는 언제나 열외.


평생 꿈에 그리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소문 때문에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상사들을 본 적 있다. 입사한 지 10년이 다 돼 가는 나도 들어본 적 없는 잊혀진 줄 알았던 이야기도 있었어. 그때도 괜찮지는 않았지만 묵인되었던 하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그 추태가 이때만 기다렸다는 듯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대체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찔러 넣은 걸까. 지나가는 그의 등 뒤로 퍼져나가는 수군거림. 결국 오랫동안 이 회사를 군림해 왔던 그 권력자는 대기발령을 받았다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리고 초라한 퇴직을 맞이해야 했다.


뭐 과거뿐이겠어? 최근 가장 유력한 승진후보였던 아무개 부장이 두 번 연속 낙제했다. 모두가 의아했던 결과. 성격이 좀 별로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온갖 지저분한 일은 다 시켜놓고 너무하시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기관장님이 거기 부서와의 회식자리에서 대놓고 말씀하셨대. 앞으로라도 승진하고 싶으면 밤늦게 후배들 좀 부르지 말고 직원들한테 막말하지 말라고. 취임한 지 이제 막 반년을 넘긴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 부장은 그분 앞에서 맨날 웃으며 굽신거리기만 했는데 말이야. 과연 누가 말했을까? 무섭지? 난 공포 이야기보다 이게 더 소름 돋았어. 그리고 알지? 소문은 이의제기도 안 먹혀. 한번 기정사실로 굳어지면?! 으으.




막내 시키기가 눈치 보인다며 팀장님이 나서서 카트를 끌고 수박을 받아오셨다. 아니 그럼 조용히 다녀오시지. 눈치 보인다는 말로 왜 가만있는 애 눈치를 주는 거야. 아오 답답이. 그리고 수박은 또 뭐가 이렇게 커? 세상에 나 이렇게 큰 수박 처음 봐.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올리고 겸허한 표정으로 수박군단을 맞이하신 부장님은 그저 세척이 끝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땀을 뻘뻘 흘리신다. 일단 시키는 대로 회의 테이블에 모여앉기는 했는데 다들 엉덩이를 달싹이는 게 익숙한 이 자리가 오늘따라 가시방석 같다. 진짜 이렇게 가만있어도 되는 건가.


드디어 시작된 부장님의 수박 해체쇼! 오 자신 있다고 걱정 말라고 하시더니 의외로 댕강댕강 수박들이 쉽게 썰려나간다. 우와아아아! 셰프님이다! 와아아아!! 별 거 아닌 칼질에도 환호하는 직원들. 캬아 진짜 다들 프로다 프로. 이 센스쟁이들. 굳어있던 부장님의 표정도 조금 풀려간다. 긴장하셨나 보구나. 하긴 원래 잘하던 것도 남들이 이렇게 보고 있으면 잘 안 될 때가 있지. 그렇게 접시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수박들. 헤헤 맛있겠다.


부장님 이거 커서 한통이면 저희 충분할 것 같아요. 양 옆에서 격하게 끄덕이는 직원들. 흐흐.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씻고 오신 부장님께 재빠른 대리님이 제일 먹음직스러운 수박 하나를 집어드린다. '자! 이제 먹자!' 와그작와작와작. 어? 완전 꿀이다! 대박!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온다. 딱 봐도 먹음직스러운 붉은 빛깔. 잘 익은 수박은 과연 그 풍채에 걸맞은 당도를 품고 있었다. 게다가 방금 막 냉장고에서 꺼낸 듯 한 시원함까지. 이 싱그러운 달콤함. 와삭와삭. 소리까지 완벽한 여름맛이다. 귀찮아서 씨까지 오독오독 씹어먹는 나를 보고 아재 팀장님이 놀리신다. '과장님 그러다 배에서 수박 자라요. 키키' 아 진짜 그게 뭐예요!  크크크. 눈치 보던 직원들은 어디 갔는지 서로 앞다퉈서 와구와구 수박을 먹어댄다. 누가 잘라주는 거 먹으니까  좋긴 좋네. 흐흥




나도 부서의 모든 허드렛일이 내 차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손님이 오면 커피도 타야 하고 매일 아침 출근하면 해야 하는 체크리스트도 있었지. 인쇄용지 채워놓기. 탕비실 비품 점검하기. 우편물 받아오기. 신문이나 개인 택배도 있으면 눈치껏 가져다 드렸지. 사전보다 두꺼운 업무용 우편물은 절차가 복잡했다. 애초에 끈으로 깔끔하게 묶어 보내는 곳도 있지만 수십 장을 클립 여러 개로 집어서 보내는 곳도 있거든. 후자의 경ㅌ우 커다란 펀치로 구멍을 만들어서 끈으로 묶고 정리를 해줘야 했다. 한 장이라도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처음엔 잘 못해서 울퉁불퉁 튀어나왔는데 이제 이 정도는 눈감고도 하지. 문서등록까지 완료하면 이제 배달 시작.


차곡차곡 쌓인 서류를 카트로 배달하면서 멀리 있는 선배들이랑 겸사겸사 인사도 나눈다. 한때는 내가 뭘 몰라서 그 일들을 해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종종 이런 갈등을 마주하게 되면서 깨닫게 된 건 막내였던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선배들이 있어서 부당하다고 생각해도 참을만했다는 것이다. 고마워. 수고했어. 감사인사와 함께 주시는 이런저런 간식들. 본인도 먹으려고 가져오셨다는 사과, 빵, 떡, 구운 계란, 영양제. 어느 날은 간식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팀원들과 나눠먹는데 사수가 나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올. 인기 많아서 좋겠네.’


그리고 오다가다 같이 하자며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았어. 특히나 내가 오기 전까지 꽤 오랜 시간 막내였다는 선배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셨다. 사수에 따르면 본인은 그 모든 일을 군소리 한번 없이 묵묵히 해왔다는데 나에게 인수인계를 주다가 이건 좀 아니다 싶었던 일들을 대폭 없애버렸다. 그렇게 줄어든 일은 무려 매일 아침 실장님 자리에 주스랑 아침 간식 갖다 놓기, 그 주스랑 간식도 막내가 준비하는 거겠지? 부서에 있는 모든 화분에 물 주기, 특히 주기적으로 부장님 난 화분 관리하기 등등. 네? 그걸 막내가 해왔다고요? 지금 2000년대 맞죠?


"요즘 다른 부서는 이런 거 안 한대요.”


부서사람들이 모두 모인 회의시간. 선배의 단호한 한마디에 윗분들은 새로운 세상을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게 선배는 계약직 기간까지 이 부서에 3년을 있었거든. 그동안 별 말 없던 사람이 갑자기 그러니까 함부로 못 했던 것 같아. 그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당연하지 않은 호의. 한참이 지나 제법 친해진 선배와 야근 후 찾아간 치킨집에서 물었다. 


“선배. 제가 그때는 잘 몰랐는데요. 지나보니까 궁금해져서요. 그때 그냥 모른 척 저한테 다 떠넘기실 수도 있으셨을텐데 왜 그러셨어요?


“야! 그걸 내가 어떻게 시켜! 솔직히 너한테 난 여기서 이런 것까지 하고 살았다 말하는 것도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아냐? 나야 계약직으로 들어왔으니까 먹고살려고 참고 정규직된 다음에는 변했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하던 대로 해온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물려줘. 그럼 내가 맨날 욕하던 사람들이랑 똑같아지는건데 쪽팔리잖아. 야 나도 선배 가오가 있지.”


계약직이라고 홀대받고 산 선배. 같이 들어온 정규직들은 사원증에 자기 사진도 박혀있고 사수도 붙여주는데 2년 동안 임시사원증을 썼다는 선배는 그저 어깨너머 눈칫밥으로 일을 배워야 했단다. 그 세월 이야기를 하면 이 가게 소주를 다 비워야하니 술 못 사는 나는 재미가 없어서 그만하겠다는 그에게 친히 소맥을 말아드렸다. 물론 스킬이 없어서 망해버렸지만. 대부분은 선배 같지 않아요. 내 말에 피식 웃는 선배. ‘알면 잘해 임마.’ 넵!! 충성충성!! 막내 시절 선배들의 사랑이 뭔지도 몰랐다던 그 선배는 나를 정말 아껴주었다. 아마 자기가 받고 싶었던 보살핌이었겠지. 좋은 사람. 


그 선배의 모범 덕분에 나도 후배들에게 꼰대짓을 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해왔던 많은 잡일들은 각자의 몫이 되었다. 직장 내 괴롭힘 법 덕분인지 뭔지 어쨌든 더 나은 세상이 되어가는 거겠지. 부디 그래야 할 텐데 말이야. 선배가 된 나에게는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다. 


커피머신도 없어졌고 냉장고 관리가 안 돼서 난 아예 사용을 안 하거든. 곰팡이만 살면 다행인데 다른 생명체도 있을 것 같단 말이야. 물론 나도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한 번씩 섭섭하기는 해. 나는 예전에 저런 거 다 했는데 하고 속으로만 몰래 아쉬워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도 기꺼이 했던 일은 아니잖아. 여전히 각 부서 막내들의 업무분장에는 '부서 서무'라는 단어가 쓰여있다. 저 하찮아 보이는 글자에 얼마나 많은 잡일들이 숨어있을지.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여전히 부당하고 억울할 것이다.


만약 선배들이 내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면. 아니 선배들이 나를 쥐 잡듯이 잡아서 꼴도 보기 싫게 미웠다면 어땠을까. 내가 왜 근무시간에 일도 못하고 저 놈들 입에 들어가는 수박이나 썰고 있어야 해? 아마 나도 도끼눈을 뜨고 익명게시판에 글을 썼을지도 몰라. 저기요! 지금이 무슨 90년대냐고요! 제가 이런 거 하려고 여기 입사한 줄 아세요? 일도 못 하니까 그거라도 하라는 거예요? 아니 누군 날 때부터 회사원이야? 당신 누구야!




"부장님이 썰어서 그런가~ 엄청 다네요. 부장님.”


이왕 먹는 거 고생한 사람 생각해서 즐겁게 먹자. 회사 좀 다녀본 팀장님의 칭찬타임에 눈치 빠른 우리들도 끼어든다. 맞아요! 맛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라며 흐흐 웃는 부장님. 하지만 남은 2통까지 더 썰었다가는 부장님이 익명 게시판에 글을 쓰실 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 고생하신 부장님께 한통을 드리고 나머지 하나는 차를 가져온 직원들끼리 가위바위보로 가져가기로 했다. 와아 이겼다! 아빠가 해냈다! 만세에!! 아이가 수박을 정말 좋아한다며 기뻐하는 과장님의 모습에 우리도 덩달아 뿌듯해했다. 잘 됐다. 근데 와이프 말고 과장님이 썰어주셔야 하는거 아시죠? 부장님도요! 꺄르르륵. 우려와 달리 즐겁게 끝난 수박파티. 그래도 부디 내년에는 제발 그만.



                    

이전 03화 쉿! 중식당에는 비밀이 가득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