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에게 뒤통수를 거하게 얻어맞았다
으어어어. 죽겠다. 출근길 내내 곡소리가 난다. 뚜둑뚜둑. 움직일 때마다 요란하게 항의하는 관절들. 12시간 넘게 앉아서 일만 해서 그런가. 허리는 온통 쿡쿡 쑤셔대고 퉁퉁 부은 다리가 구석구석 저리다. 어제 야근 한방에 이렇게 엉망진창인 꼴이라니. 20대에는 밤새 미드를 봐도 에너지 드링크 하나면 끄떡없었는데. 몸이 진짜 하루가 다르게 너덜 해진다. 자는 동안 누가 나를 잔뜩 구겨놨다가 대충 던져놓은 것 같아. 빨래는 건조기에 돌리면 금방 보송해지기라도 하지. 지금 내 몸과 마음은 답이 없다.
어젯밤 야근을 마치고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누운 침대. 으어어. 어깨 아파. 속에 쌓인 천불이 도무지 꺼지지 않아 잘 수가 없었다. 거지 같아. 최근 우리 팀에 새로 합류한 대리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거든. 그간 자기 역할을 척척 해내는 팀원들 덕에 잊고 있던 엿같은 기분.
아니 노답 후배에도 레벨이 있지. 국정감사 자료를 그따구로 던지고 가는 또라이는 보다 보다 처음이네. 걔는 지가 뭘 잘못했는지 알기는 할까. 그걸 두고 보는 상사는 어떻고. 그 두 면상을 내일 또 봐야 하다니. 으으 그냥 내일 확 연차나 내버릴까. 싫다. 싫어.
오늘따라 이 늦은 시간에도 창문 밖이 환하다. 우뚝 선 등대처럼 혁신도시를 환히 밝히고 있는 공공기관 사옥들. 평소에는 에너지 낭비한다는 민원이라도 들어올까 봐 혼자 야근할 때는 불도 끄고 일하는데. 국정감사 시즌인 게 체감되는 불야성의 밤.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국정감사는 모든 정부부처와 그 산하 공공기관의 빅 이벤트이다. 왜 가을쯤 되면 뉴스나 인터넷 기사에 장관한테 소리치는 국회의원 사진이 도배되는 시기가 있잖아. 그게 바로 국정감사야. 각 분야별로 짜인 국회의원 상임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는 정부기관이 잘 운영되고 있는지 그 대표자에게 묻고 답하는 대국민 공개 청문회. 잘못하셨어요. 안 하셨어요?! 어떻게 책임지실 겁니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종일 이어지는 국정감사. 그 디데이에 앞서 각 정부기관에서는 며칠 동안 이어지는 노주말 노휴일 24시간 철야근무 릴레이가 이어진다.
국회의원들은 공중파 방송사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국정감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어 하거든. 그러려면 전 국민의 어그로를 확 끌어모을 매력적인 질문을 던져야하잖아. 그래서 그들의 보좌관실에서는 핵심 질문을 뽑아내기위해 각 정부기관에 자료요청을 한다. 요즘 핫한 이슈에 대한 현황과 실태파악을 위한 통계자료, 기관의 대응방안이나 입장 등등을 달라는 대로 맞춰서 제출해야 하는 거지. 자료요청이 많이 들어오는 주요 사업부서는 몇주동안 본래 업무를 손에서 내려놔야 할 정도라니까.
이 시즌에는 근무시간이고 나발이고 24시간 내내 언제 어디 국회의원실에서 어떤 자료 요청이 올지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마감기한. 그쪽에서 요구하면 몇 시간만에라도 맞춰내야 해. 거기서도 우리가 보내준 자료를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보좌관들과 딜을 하긴 하지만 까라면 그냥 까는 거야. 잘못해서 그쪽 심기라도 거슬리면 으으. 결국 본사의 주요 팀장들과 각 실 주무부서까지 당직표에 따라 죄다 끌려 나와 밤새 무한대기를 타는 것이다. 그래야 갑작스러운 자료요청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으니까. 남들 눈에는 그저 아름다울 야경. 저 창문 한 칸마다 오늘은 몇 명이나 갇혀 있을까.
신입 시절에는 이해가 안 갔다. 회사 차원에서 각종 상황에 대비한 예상 질의답변서를 만드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겠다 싶은데. 아니 국회의원들은 본인들이 질문할 자료를 왜 우리 보고 준비하라는 거야? 그리고 여태 뭐 하다가 국정감사 당일이 코 앞에 닥쳐서야 부랴부랴 자료요청이 몰려오는 거냐고!!
최근에 터진 이슈면 나도 그러려니 하지. 근데 떨어진 질의서 내용을 보니까 이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아주 캐캐묵은 내용을 매년 반복해서 급박하게 요청한단 말이야. 하지만 이 짓도 이제 곧 10년 차. 더 이상 의문은 없다. 그들은 영원한 갑. 정부부처는 을. 그렇다면 공공기관인 우리는 병? 정? 그런 주제에 어디 감히 토를 달겠어.
어제는 말이지. 점심 잘 먹고 뚜비뚜바 사무실에 들어왔더니 사색이 된 팀장님이 나를 찾는거야. 새로 온 대리가 만든 국정감사 요청자료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고. 잉? 과연 대충만 훑어봐도 이 데이터 값은 말이 안 되는데.
“담당자는 뭐래요? 네? 반차라고요? 아니 그럼 이거 어떻게 뽑은 거냐고 전화라도 해보셔야죠. 그리고 이거 데이터 어떻게 뽑을지 팀장님이랑 의논하고 짠 거 아니에요? 네??”
대리님이 예전에 비슷한 자료요청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해서 그 말만 믿고 맡겼단다. 아까는 자기가 바빠서 반차라길래 일단 집에 보냈는데 뒤늦게 파일을 열어보니 엉망이라고.
팀장의 답을 들으면 들을수록 분노가 끓어오른다. 어이가 없어서 벙쪄버린 나의 표정.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내 얼굴에 쓰여있었을 무엄한 생각. 지금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했을 팀장은 그런 나에게 감히 따지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하아. 걔가 전화를 안 받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마감이 언젠데요. 네? 오늘 6시요? 미뤄달라고 하면 안 돼요? 강성파라 안 해줄 것 같단다. 뻥치지마. 말 똑바로 해. 너 그냥 무서워서 거기 전화하기 싫은 거잖아. 그걸 내가 모를 것 같아? 빠드득. 하지만 어차피 내가 안 하면 다른 팀원에게 불똥이 튀겠지.
뭐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따질 시간에 그냥 새로 데이터를 뽑아버리기로 했다. 담당업무도 아니면서 관련 부서들에 전화를 돌리고 아주 쌩쇼를 했지. 대체 누가 상사인지 내가 해결방안을 제시하면 그 말에 어떠한 토도 달지 않고 끄덕이기만 하는 팀장. 그 모습이 더 열 뻗쳐. 암튼 여차저차 그럴듯한 데이터가 나온 시간이 오후 5시 반. 과정이야 어찌 됐든 만족할만한 값이 나왔는지 팀장은 신바람이 났다. 자기가 의견서랑 해서 알아서 결재 올릴 테니까 나는 더 이상 신경 안 써도 된다며 수고했단다. 그거야 당연히 그러셔야죠.
서울에 가야 한다는 팀장은 6시 반 통근버스를 타러 가버리고 근무시간 내내 남의 일에 붙잡혀있던 나는 내 일을 하나도 못해서 야근을 했다. 오늘의 국감 당직자들이 시킨 배달음식으로 대충 저녁을 때우고 업무들이 어느정도 마무리돼서 컴퓨터를 끈 시간이 저녁 11시. 화가 나는 걸 넘어서서 웃음이 나는 상황. 하하. 남의 지지 치워주다 하루가 다 갔어. 하하하하. 텅빈 회사 엘베에서 혼자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말았다.
이래서 내가 요즘 일기를 못 써. 하얀 종이 앞에 떠오르는 건 온통 회사 욕뿐. 언제부턴가 다이어리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 감정을 다시 곱씹고 싶지도 않고. 자기반성 없이 원망으로 가득 찬 과거에 부끄러워지기도 싫고. 특히 오늘 같은 날은 일기에 쌍욕만 가득할 텐데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건 정말 별로잖아. 아오오. 오랜만에 월급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다. 다들 꼴도 보기 싫어. 아니 그 놈들 뒤치다꺼리로 야근하는 내가 제일 미워.
눈치 없는 해는 또 떠오르고 알람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뇌는 아직 자고 있는데 눈치 없는 다리가 익숙한 길을 따라 나를 회사까지 끌고 왔다. 1층 스피드게이트 앞에서 사원증을 차는데 오늘따라 유난스럽게 내 목을 조여 오는 이 놈의 목줄. 가자. 출근해야지. 일해라 월급노예.
오랜만에 다 때려치우고 싶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내 모습이 가관이다. 축 처진 어깨. 잔뜩 곱아버린 목. 다크서클. 건들면 바로 물어뜯을 것 같은 성질난 얼굴. 앵그리 거북이다. 크르르르. 건들지 마시오. 아르르르.
웬만하면 출근하면서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 나만 힘든 거 아니잖아. 출근길에 다 털려버린 체력의 부스러기를 주워 모아 밝게 인사를 주고받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지거든. 그런데 오늘은 아니다. 회사 극혐. 사무실 문을 들어서자 저기 내 자리 맞은편에 그 거지 같은 후배 놈이 보인다. 허! 아주 멀끔하네. 그래 넌 어제 반차였으니까 푹 쉬었겠지. 너 내가 어제 얼마나 삽질했는지 알긴 하니? 하!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관두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팀장이 커피를 사준단다. 같이 나가서 이야기 좀 하자는 시그널. 평소 같으면 '오 개꿀! 콜!' 하면서 순순히 따라나설 텐데.
“됐어요.”
표독스러운 한마디로 반항심을 토해낸다. 제대로 들이받는 것도 아니고 궁상맞지만 이 정도 티는 좀 내야겠어. 그래도 다른 팀원들은 죄가 없으니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그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말없이 조용히 건네주는 레모나.
“고마워.”
왜 맨날 때리는 놈 따로 달래는 사람 따로인지.
아침부터 회의실에서 고성이 오간다. 주인공은 진상후배와 팀장. 한참 뒤에 회의실을 박차고 나온 팀장 얼굴이 시뻘겋네. 척척척. 잔뜩 성난 발걸음이 사무실 밖으로 사라지는데 후배는 나오지 않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고요해진 부서. 사람들의 고개가 회의실과 우리 팀원들 사이를 바삐 오간다.
“저기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옆팀 과장님의 채팅에 스팀이 훅 오른다. 아 진짜 짜증 나네. 지가 가던가! 하여튼 이놈의 회사사람들. 인심은 코딱지만 하면서 오지랖은 태평양이야. 그리고 후배 쟤도 참 가지가지한다 정말. 암튼 나도 더 이상 덤탱이는 못 참아.
결국 과장님에게 어제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고발하고야 말았다. 그런 상황인 줄 몰랐다며 미안하다고 사과도 듣고 위로도 받았는데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렇게 고고한 척하더니 결국 나도 일름보가 되어버렸네. 만천하에 알리면 속이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왜 이리 깝깝하지. 후우. 이 이야기는 앞으로 어디까지 퍼지려나. 하지만 방법이 없었어. 남들은 우리가 텃세 부리는 줄 알 거 아니야. 어제 야근으로 내 의리는 할 만큼 다 했잖아. 다른 직원들의 키보드도 요란한걸 보니 나처럼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는 듯하다.
오늘따라 목에 뭔가 턱턱 걸리는 게 밥맛도 영 별로네. 시원찮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니 팀원들의 표정이 묘하다. 아까 일 때문인가? 근데 이건 뭐지? 내 책상 위에 곱게 놓인 낯선 물건. 민트색 리본으로 포장된 고급진 선물 상자에 나 또한 얼떨떨한 표정을 짓게 된다. 머릿속에는 계속 물음표만 떠오르는데 아무런 표시도 없고. 혹시?
하. 역시 그랬군. 메신저를 켜보니 진상후배에게서 쪽지가 와있다. 뭐야? 진짜 너였어? 아르르르르.
‘어제 저 때문에 하루종일 고생하셨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거 드시고 상하신 기분이 조금이나마 풀리시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뚜껑에 갇혀있던 화려한 향들이 뒤섞여 올라온다. 색색깔로 곱게 놓인 올망졸망한 마카롱들. 이거 딱 봐도 보통내기가 아닌 녀석들인데. 카페상호를 검색해 보니 여기서 무려 15분 거리에 있는 해외 유학파 파티셰의 프랑스 디저트 전문점이란다. 여길 언제 갔다 온 거지? 점심시간에? 그럼 밥은? 이 정도 사이즈면 가격도 꽤 나갈 것 같은데. 하아. 머리가 지끈거리네. 이걸 어쩐다. 받아도 기쁘지 않은 선물도 있구나.
솔직히 그냥 안 받고 쌩까고 싶은 기분이다. 하! 내 돈 주고 사 먹고 말지! 이 쪽지 내용도 솔직히 다 핑계 같아. 컨펌도 안 받은 일을 그냥 막 던지고 가는 게 어딨어. 그것도 국정감사 자료를 말이야. 신입도 아니면서 이 정도 일에 우선순위 파악이 안 되나? 그리고 이거 받고 봐주면 나중에 또 사고 치고 대충 선물로 퉁치거나 뒤에서 이런저런 이상한 소리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궁시렁궁시렁. 죄 없는 마카롱만 이글이글 노려본다.
어쨌든 사과했잖아. 게다가 이 정도면 아주 준수한 반성문이지. 회사에는 위고 아래고 할 것 없이 자기 잘못에 대해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태반이다. 미안한 척이라도 하면 양반이야. 까놓고 말해서 지금 이게 쟤만 독박 쓸 상황도 아니고.
반차 낸 직원을 못 가게 붙잡느니 나한테 욕 먹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건 팀장이잖아. 데이터 관련 부서에 있던 내 경력과 모른 척 할 수 없는 내 위치까지 치밀하게 계산된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주 안일했지. 그런데 지금 내 분노는 한쪽으로 쏠려있다. 후배니까 마음껏 고까워할 수 있다 이건가. 아침부터 냉랭하게 굴었을 나에게 사과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텐데. 갈팡질팡 마음이 바쁘다.
내 마음속에는 저주 리스트가 있다. 나에게 미움받아 마땅한 자들의 목록. 일부러 새겨 넣은 것도 아니고 잊으려 애써봐도 지워지지 않는 이름들.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명단은 갈수록 점점 더 길어질 뿐 줄어들 생각이 없다. 그들의 불행에 통쾌해하면서도 그런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환멸.
이미 만실인 나의 감옥에 죄수 하나를 더해서 내가 얻는 게 뭘까. 가까운 사람을 싫어하는 대가로 나는 또 얼마나 좀먹어 들어갈까. 고민 끝에 나는 뒤통수 후배에게 붙여둔 진상 타이틀을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치솟던 감정을 잠시 제쳐둔 채 써내려가는 답장.
‘어제 일로 화가 많이 나긴 했어요. 이런 상황에 기분 좋을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사과를 해주셔서 마음이 좀 풀렸습니다. 선물도 감사해요. 양이 넉넉해서 팀원들과 다 같이 나눠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네 용기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다. 내 맘대로 골라낸 마카롱을 2개씩 종이컵에 담아 팀원들에게 돌렸다.
"대리님이 저희 먹으라고 사 오셨대요.”
나의 말에 흠칫하는 팀원들. 불안하게 흔들리는 공기. 뻘쭘하네. 대리님에게도 얼른 마카롱을 내민다.
“드세요.”
"전 괜찮아요! 과장님 더 드세요.”
“아니 그냥 같이 먹어요.”
“저 진짜. 진짜 괜찮아요.”
투닥투닥. 옥신각신.
“아오 진짜 이 고집쟁이야!”
나의 버럭에 팀원들의 웃음이 터진다. 나도 웃고 후배도 웃고. 부디 이 선택이 해피엔딩이면 좋겠어.
“감사해요 과장님”
그래. 알았으면 앞으로는 잘 좀 해보자.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마카롱 하나를 꺼내 문다. 바사삭. 부드럽게 부서지는 분홍빛 마카롱. 속에 들은 크림에서 뭔가 씹힌다. 아 이거 라즈베리네. 한입거리도 안 되는 마카롱을 토끼처럼 앞니로 야금야금 베어 먹는다. 크크. 이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마카롱 선택. 와그작. 아 피스타치오 맛이다. 오독오독. 이번에는 간간히 견과류가 씹힌다.
커피로 사라질 맛이 아쉬워 입에서 모두 녹아 사라질 때까지 오물오물 맛을 느껴본다.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받은 마카롱인데. 하나하나 소중하게 오감으로 느껴봐야지. 마카롱을 마주할 때면 항상 똑같은 생각을 한다. 이 작은 게 왜 이렇게 비싸지? 하지만 먹고 나면 그 생각이 싹 사라져. 파티셰의 고생이 잔뜩 녹아있는 호사스러운 맛. 과연 비쌀만하구나. 우선 2개만 먹고 뚜껑을 닫는다. 한 번에 와구와구 먹어치우기에는 너무 예쁘잖아.
할 일이 남았어. 옆팀 과장님에게 채팅을 건다.
‘대리님이 저한테 정식으로 사과하셨어요.’
그랬다니 다행이라는 과장님의 답변. 부디 아까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달라는 의미 없는 부탁을 청한다. 나도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지. 하지만 어쨌든 경솔했어. 괜히 급한 성격 탓에 후회만 하나 더 늘었네.오늘은 오랜만에 일기를 써야겠다. 그래야 다음에는 이런 섣부른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지.
아파트 불이 하나둘 꺼져가는 어둑한 밤. 디카페인 커피 한잔을 내리고 소파에 쪼그려 앉은 채 다이어리를 펼친다. 글씨보다 백지가 더 많은 걸 보니 올해도 다 쓰기는 글렀구먼. 거기에 마카롱도 하나. 바삭. 오! 얼그레이. 씁쓸하지만 달콤한 게 딱 오늘 나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