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불행에 이름표를 붙여

백, 그리고 쉰아홉 번째 시

by 깊고넓은샘


각자의 불행에 이름표를 붙여



고급 리조트 소연회실

캐시미어로 감싼 한 무리의 남녀가

둥글게 둘러앉아

각자의 불행을 털어놓는다


가습기 물이 떨어질 때까지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모두가 지쳐갈 무렵

진행자는 산책을 제안한다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지켜보던 나는

한 명, 한 명의 불행에

이름표를 달아본다


사업 실패와 가정 불화

배우자의 배신과 자녀의 일탈

고부 갈등과 친인의 사망

모두 다른 이름표가 붙는다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던지고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공감한다

충분한 공감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카드를 꺼낸다


이건 왠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두개골 한쪽이 간질간질하다

알듯 말듯 미칠 것 같다


오, 그래!

이건 할리갈리야


앞사람의 카드랑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이

이어서 자신의 카드를 꺼낸다

다들 비슷한 불행카드를 가지고 있다


불행의 이유는 각자 다르지만

이 자리의 대부분은

그 불행을 가지고 있었거나

혹은 가지고 있다


혹시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을 모으는 습성이 있는 건 아닌가

불행은 왜 그들을 비켜가지 않는가


그냥

불행카드는 세상에 널려 있는데

그걸

뽑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이전 11화기울어진 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