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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S Engineer Nov 25. 2023

플레이 리스트

2023년 11월 회고록

11월의 아시노 호수


봤던 영화 다시 보기, 들었던 음악 다시 듣기, 했던 생각 다시 하기.

나의 가장 큰 습관 중 하나는 '꽂히면 무한 반복'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증은 들었던 음악 다시 듣기인데, 누군가가 내 한쪽 이어폰을 가져가서 하루 동안 나와 공유한다면,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그 노래 좀 작작 들으라고 한 소리 들을 게다.


그래서 내 플레이리스트는 항상 빈약하다. 애초에 다섯 곡이면 일주일도 부족할뿐더러, 다음 노래에 꽂히면 그전에 꽂혔던 노래는 가차 없이 플레이리스트에서 제거된다. 갑자기 드는 생각. 그럼 나는 정이 많은 것일까, 냉정한 것일까?

그 말을 들은 내 절친이 말하길, 음악 듣는 습관은 연애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한다. 맞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이번 11월 회고록은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바로 11월의 플레이리스트 꺼내기.

보통은 요즘 내가 하고 있는 생각 리스트다.




01 PEOPLE - CODE KUNST

어쩌면 당신이 아는 나는 내가 아닐지도
근데 나를 내가 설명하기엔 너무 말이 길어져
그 뜻은 나조차도 나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꼬인 존재라는 거지 뭐


나는 내가 정이 많은 사람인지, 냉정한 사람인지 모르겠다. 게으른 사람인지, 부지런한 사람인지. 세속적인지, 고답적인지. 보수적인지, 개방적인지. 솔직한지, 쿨한지, 지질한지.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겠다. 아니, 사실은 매일 답을 하는 질문이지만, 매번 그 답이 달라진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나의 모습은 선명해지기를 기대했는데 오히려 초점이 흐려지고 차원의 축이 계속 더해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내 속 깊이 꼬인 실타래를 풀다가 지칠 때면, '남들도 똑같을 테니 다른 사람에게 좀 너그러워져야겠다'는 속 편한 합리화를 한다. 나를 이해해 주고, 받아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겠다는 생각도 함께.





02 Baby I know - THAMA

언제부터 우린 서로 느낌보단 계산적인 그런 걸 쫓아가고 있어


첫 번째, 학생 때 나는 뭐든지 '꼴리는 대로' 선택했다. 이불킥을 몇 번 하고, 뇌를 좀 더 거쳐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고 다 했다. 그 또한 뇌를 좀 더 거쳐야겠다는 반성을 했다. 지금은 친구들에게 나는 신중한 사람이 되어있다.

두 번째, 부모님에게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라'라고 소리치던 내가, 지금은 그 잔소리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방금도 부모님과 통화하면서 잔소리 그만하라며 말을 끊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 부모님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 낯선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런가, 요즘 부모님과의 통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세 번째, 분명 우리 팀이 잘못한 일이 있었다. 영상 회의에서 어지러운 대화가 오가는 와중에 우리 팀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가 냈다. 파트장님은 기가 막힌 생각이라며 나를 칭찬했다. 작년의 나는 이럴 때 침묵하는 것을 선택했던  같다. 내년에도 그럴 것 같다. 단지 올해는 나의 승진이 걸린 해였을 뿐이다.

네 번째, 파트너를 만나는 일은 이성적인 끌림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현실적인 선택을 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내 뇌를 거쳐갔을까. 그만큼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었나. 어쨌든 그렇게 무럭무럭 자란 뇌 덕분에 내 머리는 이만큼 굵어져 버렸다.





03 Wait - THAMA

일단 기다려보자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해
한마디도 더 말자 이런 시간도 필요해
좀만 기다려보자 내일의 나의 선택을
한마디도 더 말자 입을 다물고 존버해


나는 혼자 운전하는 걸 좋아한다. 운전 자체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운전하면서 부르는 노래만큼 맛있는 게 없다. 발라드부터 힙합까지 전 장르를 아우르며 몇 시간을 불러도 타박하는 사람 하나 없는 나만의 private 노래방. Wait는 요즘 내가 제일 많이 부르는 18번 곡이다. 이유 모를 조급한 마음이 들 때마다, 방향을 잃은 생각들이 구름처럼 머리에 잔뜩 껴서 금방이라도 밖으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을 때, 지친 마음에 J의 본분을 잊고 충동적인 결정을 하고 싶을 때, Wait의 가사가 떠오른다.

워워 진정해 재성아, 일단은 머리를 비우고, 내일 다시 생각해 보자.




04 Lemon - Beenzino

어느새 내 껍질은 썩어 곰팡이가 피네
우주인 줄 알았던 내 ego는 그저 과일, 음악은 내 신음
신의 손에 난 레몬, 눈이 튀어나오게 날 꽉 쥐어
내 인생은 레모네이드 sweet and sour


05 Camp - Beenzino

여덟 시 반쯤에 또다시 어둠이
180짜리 곤충, 나의 발은 더듬이
작아진 나에 비해서 너무 커진 숲의 볼륨


올여름 빈지노의 노비츠키 앨범이 발매되고 나서 한동안 이 앨범만 들었다. 미국 출장 갔을 때에도 오프라인 저장을 해둔 빈지노 앨범을 계속 듣고, 또 들었다. 노비츠키 앨범은 결국 빈지노의 회고록이다. 회고록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자기반성이며, 자기반성을 이끌어 가는 것은 결국 나의 자조 섞인 목소리다. 나 스스로가 사실은 보잘것없다는 것. 억지로 부풀린 나의 껍질은 그저 계속 썩어 들어갈 뿐이라는 사실. 당당했던 내 발걸음은 어느새 바닥을 살피는 더듬이가 되어버렸고, 그 사이 세상은 자꾸만 커져버렸다는 슬픈 이야기.

그래 너무 좋았다. 마치 친구가 나에게 웃으며 '너 사실 좆밥이야 새끼야.'라고 말하는 느낌이었다. 그게 왜 위로가 되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긴 하다. 정말 모르겠으니까.



보너스) Gym - Beenzino

노천온천, 김 모락모락
하얀 설경 구경, 설경구야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후지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나처럼 노비츠키에 빠진 친구와 함께 도쿄를 다녀왔다. 열심히 옆에서 영상을 찍더니 가사와 찰떡인, 기가 막힌 릴스를 뚝딱 만들었다. 고마워 강산아.

따뜻한 노천 온천, 셋이서 술 마시며 함께 봤던 롤드컵, 11월의 회고록에 빠져서는 안 될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초점은 나갔지만 이번 여행에서 제일 아끼는 사진이다. 나도 결혼할 때가 됐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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