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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eseong Lee Dec 17. 2023

나는 왜 일을 할까?

2023년 12월 회고록

    나는 왜 일을 할까? 또는 나는 왜 일을 해야 할까?라는 고민을 요즘 많이 한다.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이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 질문에 빠질 수 없는 답변이 나의 업이기에 인생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분명히 매우 높다. 하루 24시간 중에 8시간을, 혹은 그 이상을 일을 하면서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을 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일을 선택했는가?


    열정이 가득했던 나의 스물일곱, 자동차를 좋아하고 전공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싶었고, 꿈꿨다. 이처럼 비슷한 질문인 '내가 왜 이 일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명확하다. 어쩌면 내가 이 일을 선택한 이유가 더 이상 나의 동력이 되지 못하거나 혹은 애초에 나의 판단이 잘못되었거나, 원인이 어떤 것이든 무언가 잘못된 것은 확실하다. 여기까지 잠깐 나의 고민을 멈추고 이 어려운 문제를 객관식으로 만들기 위해 주변인들의 답을 훔쳐보았다.


답 1. 돈


    궁금하다면 주변인들에게 한번 물어보시길. 일을 왜 하냐는 질문에 열에 아홉은 돈이라 대답한다. 주변에 계신 분들의 연령대가 워낙 다양한지라 돈을 선택한 이유도 천차만별이었다. 먹고살아야지, 돈이 최고야(?), 기저귀값 벌어야 해, 집 사야지, 애들 대학 보내야 돼, 노후 대비 해야지 다들 웃으면서 대답한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진지충답게 '경제적 자유가 온다면 일을 할 이유가 없겠네요?'라고 물었다. 그 대답 역시 간단했다. 바로 때려치워야지, 건물주 돼서 골프 치러 다녀야지, 세계 일주해야지, 이혼해야지(실화다. 맵다 매워). 이 중 절반 정도는 그래도 다닐 거라는 대답을 하셨다. 그 이유는 하나같이 비슷했는데, 집에만 있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라는 것이었다. 그렇다 재미도 중요하다.


답 2. 일에 대한 애정 (혹은 재미)


     '사람은 응당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지'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런 대답을 하신다. 왜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냐는 질문을 하면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기에 일을 하는 순간에 즐거워야만 삶이 본질적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합리적인 주장을 하셨다. 뜨거웠던 시절, 나에게 가장 끌리는 주장이었지만 요즘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5년 동안 사랑했던 일이 더 이상 흥미롭지 않고 더 나아가 나에게 고통만 준다면, 나는 당장 그것을 그만두고 다른 재밌는 일을 찾아 떠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저 일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지 않을까? 마치 우리가 이별 후 새로운 시작을 망설이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듯이, 일도 그럴 수 있다고? 나는 그 의견에는 반대한다. 이성 간의 사랑에는 '성애'라고 하는 절대적인 생물학적 생존 본능이 있다. 우리가 다시금 일을 시작하게 만드는 데에 어떤 욕망이 큰 역할을 한다 하더라도 성애보다는 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답 3. 관계


    내가 일하는 곳에는 20년 넘도록 한 회사에, 그것도 한 팀에 다니신 분들이 꽤 계신다. 그분들과 오랜 시간 일해온 팀원들의 사이는 어찌 보면 가족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처럼 보인다. 지극히 사적인 비밀도 쉽게 터놓고 술자리는 물론이거니와 정기적인 취미 생활을 함께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나에게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 광경이지만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회사에서 그만큼 마음 맞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혹은 마음을 열지 못하는 나이기에. 하나 재밌는 것은 일을 하는 이유가 사람 때문인 경우는 많지 않지만, 도저히 이 일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사람인 경우는 많다.


답 4. 성취감


    이것은 올해 초쯤, 나의 4년을 돌아본 답변이었다. 승진, 1~2년 단위 개발 기술의 성공적인 양산과 같은 굵직한 이벤트부터, 차종 개발 업무처럼 루틴한 업무들을 무사히 끝마쳤을 때의 성취감은 곧 나의 자존감과 연결되었다. 나의 혹은 누군가의 인정은 계속 이 일을 쥐고 버틸 수 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성취감을 목표로 일을 했을 때, 나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워라밸의 붕괴'였다. 나는'워라밸'을 단순히 '퇴근을 몇 시에 하느냐'와 같은 질문을 통해 수치적으로 가늠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신 '업무 시간 종료 후에 나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작년부터 퇴근 후에도 머릿속에서 업무가 떠오르는 일이 잦아졌다. 퇴근길에, 혹은 밥을 먹다가, 주말에 운동을 하다가 뜬금없이 머릿속 알람이 울린다. 다시 보고서를 수정하고, 자료를 작성하고, 메일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더 많은 일들이 나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답 5. 책임감


    우리 팀에 근속연수 25년을 훌쩍 넘겨 퇴직이 1년도 채 남지 않으신 고 부장님이 계신다. 우리 아버지뻘이시다. 8년 전까지 파트장(보직자)으로 파트원들을 이끌었다가 승진에 실패하고 일선에서 내려오셨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두 분과 함께 양산이 2년 남은 핵심 차종을 하나 맡고 계신다. 5년 후배 사원인 파트장 밑에서 말이다.

    승진에 대한 기회도 박탈되었으며, 양산을 당신의 눈으로 보지도 못할 차종을 개발하계신다. 사실 평소에도 이 질문에 대한 고 부장님의 답변이 궁금해서 자주 여쭤봤었다. 부장님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그래도 내가 맡은 건 잘 마무리하고 가야죠
  

    만약 나에게 이곳에서 마지막 1년이 주어진다면, 나는 노후 대비를 위해 남는 시간에 틈틈이 자기계발을 한다거나 중요한 업무들은 적당히 후배 사원들에게 맡기고 서포트하는 방식으로 마무리할 것 같다. 이 일은 2년 뒤 나의 성과도 아닐 것이며, 잘했다고 돈을 더 주는 친절한 회사도 아니고, 이 일을 계속 사랑하기에는 이미 1년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부장님은 여전히 임원급 회의에도 주도적으로 참석하시고, 얼굴을 붉히며 일선에서 의견을 개진하신다. 내가 이곳에 온 이후 4년간 누구보다 한결같이 묵묵히 일하셨다.


    고 부장님이 느린 타자 때문에 늦은 시간까지 보고서를 작성하시던 모습을 본 적이 많다. 그 모습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얼른 퇴근하시라고 보채곤 했다.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은 '타인의 인정'이었기에, 존경한다는 말도 자주 해드렸다. 그리고 퇴직 전에 편지를 꼭 써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25년 뒤, 아니 당장 3년 뒤에도 고 부장님처럼 제게 주어진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을까요? 일에 대한 당신의 철학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 모습만큼은 닮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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