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회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by JS Engineer

작년 봄, 가족 앨범을 오랜만에 펼쳐봤다. 사진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우리의 시간들을 두꺼운 앨범에 빼곡히 담아두셨다. 병원 출생증명서에 찍힌 큰누나의 작은 발바닥부터, 돌사진, 아버지의 중국 유학 시절 가족사진, 누나의 첫 연주회,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나의 사진들, 그렇게 차례로 넘기다 보면 나의 아홉 살 무렵 운동회 사진으로 앨범은 끝이 난다.

조카의 얼굴이 겹쳐 있는 누나들의 사진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렸다. 땡그란 눈, 집중할 땐 눈썹을 힘껏 오므리는 습관, 어딘가를 넋 놓고 빤히 쳐다보는 표정,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유전의 힘은 대단하다며 나는 한참을 신기해했다. 나와 닮은 존재를 마주하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자주 보아 익숙해진 첫 번째 앨범을 덮고, 이전까진 한 번도 펼쳐보지 못한 검은색 앨범이 상자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이사하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예전 앨범을 짐 정리하면서 찾았다고 했다. 당신의 어린 시절의 담긴 앨범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을 자랑하면서 아들에게 펼쳐보일법도 한데, 아버지다운 무심한 말투였다.

앨범의 첫 장엔 나와 똑 닮은 아이가 짙은 차이나 카라티의 교복을 입고 서있었다. 곱슬한 머리, 기다란 목, 짙은 눈썹에 까무잡잡한 피부, 지금의 아버지보다는 나를 닮은 모습이었다. 흑백 사진을 뒤에 처음으로 등장한 칼라 사진에서 아버지는 500cc 맥주잔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고 계셨다.

"아빠 여기 사진들 되게 낯설다."

"그땐 아빠도 니처럼 잘 나갔다." 머쓱할 때마다 습관처럼 하시는 말씀이었다.

낯설면서도 반가운 모습들을 지나, 어느새 사진에는 엄마도 함께 등장했다. 아버지는 두꺼운 모직 더블 코트를 입고, 엄마는 하얀 털이 달린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제주에서의 신혼여행 사진처럼 보였다. 세 번 만나고 바로 결혼을 약속하셨다는 두 분은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사진에선 두 분이 함께 입을 맞추고 계셨다.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는 재빨리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엄마 사진은 없어?"

"아빠 앨범이니까 엄마 사진은 없지."

"같이 찍은 사진은 있는데 뭘"

그렇게 아쉬움에 빈 앨범 종이를 계속 뒤로 넘겼을 때, 우연히 앨범에 꽂힌 편지 하나를 발견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둘째 이모에게 어머니가 쓴 편지였다.




언니야 오늘은 윤동주의 "누나! 오늘 눈이 왔습니다. 글자 하나 쓰지 않고 겉봉투도 부치지 않고 하얀 눈을 봉투에 담아서 보낼까요. 누나가 계신 나라에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시를 생각하면서 언니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더라.

요즘에 나는 시를 읽기를 좋아해. 윤동주, 유치환, 헷세, 푸쉬킨 시를 특히 좋아해.

그래서 혼자 시를 읽고 천장을 쳐다보고 언니를 생각해. 우리는 얼마나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었을까.

언니는 내가 예비고사를 치고 난 뒤 시집을 가버렸지. 그리고 언니의 따뜻한 배려를 생각하면 더욱더 언니가 그리워지지.

언니도 어쩌면 내 또래의 소녀가 가지는 센티멘털한 감정을 이해할는지 모르겠다. 책에 파묻히고, 시를 읽고, 캄캄한 거리를 걸어오면서 허전한 마음과 함께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골목으로 향할 때, 그래서 그리운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방문하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 나는 참으로 그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진다.

내일 새벽에도 천장 위에서 쥐들이 법석대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그 소리에 깨어나서 생각을 쓸 수 있겠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나도 그런 사람을 생각하고 번민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건만, 이젠 물가고에 시달리는 투박한 아내가 되었다."라고 쓴 글을 보았어. 언니야, 언니는 이제 결혼했지. 재형 오빠도 며칠 안 있으면 군에 간다고 했지...

항상 건강하고 수현이도 예쁘게 크고 형부의 건강도 빌면서 이만 줄일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는 것이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고
그리고 지난 것은 항상 그리워지는 것이다.

- 푸쉬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1981년 1월 14일, 동생 혜순이가




처음 이 편지를 읽자마자 나는 바로 사진을 찍어 갤러리에 보관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이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왜 그토록 앨범 속의 사진들이 나에게 낯설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작은 누나가 둘째를 가졌다고 우리에게 알렸을 때, 나와 큰누나가 축하한다며 이모티콘과 축하의 메시지를 보낼 때, 아버지가 남긴 짤막한 문장을 잊을 수 없다.

"이 세상에 나은이가 또 태어나는 거네."

30년의 시간을 기다려, 다시 태어날 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느낄 감정이 궁금했다.

그리움일까, 기쁨일까, 미안함일까, 아니면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어쩌면 모든 것일 수도 있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월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