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상황에 오랫동안 놓여있다 보면 그 의미와 무게감을 의식할 수 없게 된다. 되려 자연스러워져 위험성조차 가늠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른다.
죽어야 지금의 고통을 끝낼 수 있겠구나, 싶을 만큼 힘든 시기가 있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 우울증과 무기력이 영혼까지 잠식할 기세로 내 일상에 자리를 잡아 버렸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때맞춰 밀고 들어온 역병으로 꼼짝없이 집 안에 고립까지 됐다.
" 긴 터널을 마저 빠져나가지 못한 상태다. 오늘 이야기는 그 안의 기록이기도, 과정이기도 하다."
우울과 무기력이 검질겨서 다른 감정이 껴들어도 그 별개의 감정을 알아채고 구분해 내는 일은 사실상 어려웠다. 오로지 하나로 통합된 덩어리에 숨구멍이 겨우 뚫린 상태였었다. 그때 할 수 있었던 일은 고작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수면에 빠져드는 일뿐. 계속해서 수면 상태로 밀어 넣었다는 게 맞겠다. 환한 햇살 아래 나를 들어내는 일이 엄두가 안 나서 하루를 어두운 수면상태에 가둬 두는 것이 전부였다. 사계절은 있었지만, 그 시간들은 채색이 빠져버린 겨울과 다르지 않았다.
사막에 떨어진 것처럼 막막하고 절망적이었다. 영화 <마션>의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된 것 같은 날의 연속이었다. 그는 홀로 남겨진 화성에서도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한 궁리와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었으니, 내 상태와는 영 딴판이었지... 절망의 끝단에서 보여주는 그의 희망은 거짓말처럼 감동적이기까지 해서 어렵게 찾은 '고립'이란 접점조차 의미가 없게 돼버렸다.
AI 로봇도 이 정도 표정은 짓지 않을까 어이없는 생각이 들 만큼, 표정은 실망스럽게 변해갔다. 잃어버린 표정을 찾기 위해 거울을 봐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게 뭐라고, 처음엔 그런 행위조차도 힘겨운 일이었다. 거울 앞에 서는 일은, 자기 직시와도 같아서 정말 괴롭고 두려운 일이었다.
위험신호를 처음 감지했을 때, 9시 뉴스 혹은 지역 뉴스에 나오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나만큼 내 자신이 안타까운 이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오로지 나 자신뿐이다. 뭐가 됐든 위험에 처한 나를 구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구조를 기다리는 동안 식량을 구하기 위해 화성에서 감자를 심었던 마크의 노력처럼, 나는 깊은 수면상태에 빠져드는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일이 우선이었다. 그 상태로 더 잠식됐다가는 영영 햇빛 아래 나서는 일이 어려워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그런 사연으로 시작된 도전이 새벽 기상이었다. 내 새벽 루틴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과 치르는 매일매일의 항쟁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은 것이다. 예상하겠지만 새벽기상이 쉬웠냐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천근만근이란 말의 무게감을 절감했다. 해가 뜨고도 한창 정오로 가는 시각에도 기상은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숱하게 결심을 다지고 다져도 몸이 그 결심을 배신하는데, 용뺄 재주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데 한심한 시간을 얼마나 들이고 쏟아야 가능한 일이 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면, 당신도 이 늪의 시간을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니 새벽 기상이 가능해지기까지, 그 지난한 과정을 어떻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제때 끼니를 챙겨 먹이고, 음악을 들려주고 운동도 시키면서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들에 대해 꾸준히 독려할 수 있게 된 지금, 여기까지 오는 데는 스스로를 구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가장 컸다. 예전의 모양새를 갖추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던 날들의 나를 극복하기 위해 매일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어려움은 본인만 알지, 외상이 아닌 이상 주변인은 그 수렁의 깊이를 알 도리가 없다. 안다고 해도 적극적인 도움을 지속적으로 주기는 어렵다. 피곤한 일이니깐. 게다 전이까지 쉬운 증상이라 알아챘다고 해도 몇 마디 거둘 수는 있겠지만, 그 긴 터널을 함께 통과해 주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긴 주변의 어떤 말도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만. 상황이 해결되고 난 뒤에야 힘을 갖게 되는 말들 뿐. 내 상태에 와닿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그들의 외양 치레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가르침을 주려고 덤벼들 땐 극도로 피곤함을 느낀다. 시끄러운 소음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대놓고 사양하고 싶어진다. 죽은 자의 말이 교훈이 되기 쉬운 건, 그들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누군가 이렇다고 한들, 같은 터널에 서 있는 내가 당신한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겠나. 그저 내 경우, 그 과정의 변화를 얘기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약물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았던 나로서는매일매일 전장에 나가는 심정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우울, 무기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나를 구제할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란 엄중한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고 난 후, 전에 없던 생의 의욕도 생겨나더라. 빠져든 시간보다, 빠져나오는 데 더 많은 시간과 공이 필요했다. 지금 역시 사투 중이다. 굴러 떨어지는 건 한순간에도 가능한 일이지만, 다시 제자리를 잡기까지는 몇 곱절의 힘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반가운 것은, 그 긴 터널을 걸어 나와 끄트머리 어디쯤 서 있는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거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곤죽 같다면, 생각은 금물이다. 생각이란 무한 루프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아예 생각 자체를 버려라. 똥꼬에 힘 뽝 주고, 사력을 다해 그저 움직여라! 지금은 그럴 때다. 이게 시작이다. 무사 귀환한 마크처럼, 우리도 이 긴 터널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보자.
당신의 하루가 햇살 아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응원이기도, 또 내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니 시끄러운 잡음만은 아니었길 바란다. 잊지 마라. 움직여라. 그래도 안된다면, 마크의 생환을 도와준 조력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그때, 말없이 밖으로 끌어내준 친구가 고맙다. 말없이 함께 밥 먹어주고, 함께 걷되 따로 걸어줄 수 있는 친구, 당신에게도 그런 이가 있기를 기도한다. 햇살이 좋다. 함께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