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AN Jun 21. 2023

이만하면 충분해, 난 잘 살고 있어

장 봐 온 재료들을 분류한다. 과일과 생선부터 챙겨 냉장고에 넣어두고, 소분이 필요한 재료들은 따로 포장해서 냉동과 냉장칸에 보관한다. 한 묶음 사 온 대파까지 썰어서 용기에 담아 냉동실에 던져두고 돌아보니 점심때가 다 됐다. 혼자만의 식탁을 차리게 된 후, 식단 구성이 단출해졌다. 기존의 조리 방식도 단순하게 바꾸면서 맛 역시 절약한 시간만큼 솔직해졌다. 여전히 굽고 볶아낸 단짠 음식들을 먹고는 있지만, 예전보다 횟수는 줄었다.


여름이면 옥상텃밭에서 키운 푸성귀가 식탁에 빠지지 않고 올라온다. 갖가지 쌈 채소와 아삭이 고추, 멸치를 넣은 꽈리고추 볶음, 가지볶음, 오이소박이, 호박전, 시금치와 깻잎나물과 취 ,,, 특별한 레시피 없이도 옥상에서 키워낸 재료만으로 7첩 반상이 충분히 만들어진다. 오늘은 여린 호박잎을 뜯어다 UFO를 닮은 스테인리스 찜기에 쪄냈다. 뚝배기에  바특하게 끓인 짭조름한 된장찌개 한 숟갈 얹어 뜨거운 호박잎 쌈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여름 쏘울푸드 중 하나다.


일주일에 서너 번 학교에 나가게 되면서 혼자 사는 공간인데도 손길 닿지 않은 곳곳에서 티가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예외가 있다면 텃밭 돌봄이다. 다른 일을 덜 볼망정, 텃밭 가꾸기는 하루도 거룰 수 없는 특별한 일과다. 비 오는 날을 제하고는 늘 물을 줘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뭣보다 옥상텃밭에서 노는 게 즐겁고 재밌다. 어떨 땐, 텃밭 먹거리가 아니라 관상용 화단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성장하는 모습도 장하고 푸른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한 게 행복하다. 하나 성가신 게 잡초이긴 한데 그마저도 완성된 텃밭의 모습으로 보여서 좋다. (너무 깨끗해도 인간미 없고) 주기적으로 뽑아주지 않으면 텃밭의 주인을 알 수 없게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ㅎㅎ


날 잡은 김에 반찬도 서너 가지 만들어 놓고 대청소를 했다. 마음이 가뜬하다. 기분 탓이겠지. 오늘따라 커피 풍미가 끝내준다. (참고로 대기업 봉지 커피^^;; )  딱 요런 순간! 정리를 다 끝내놓고 조용히 앉아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순간에 충만함을 느낀다. 저마다 '잘 살고 있다고 느끼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난 이런 순간이다.


속도는 아주 더디고 느리지만 바라는 삶의 방향대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지금 나를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 5년 후, 혹은 10년 후 내 시간이 어떻게 변화해 있을지는 알 수 없어도 오늘의 나보다 내일 더 그렇게 조금씩 성장해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된다. 더디더라도 꾸준하게!




#옥상텃밭  #여름 나기 쏘울푸드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 가족들 안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