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식물이 됐든 반려동물이 됐든 생명 있는 것은 집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까지도 어디에도 메이고 싶지 않은 건 ' 그 시간 ' 에 강화된 생각 때문이리라. 온전히 내 손에 달린 생명을 책임지는 일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에, 내 상태는 최악이었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그 효자가 바로 나였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병수발은, 엄마보다 앞서 세상을 떠나고 싶을 만큼 몸도 지치게 했고 마음까지 병들게 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아침이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런 날이 연속됐다. 죽을힘을 짜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더 집착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의지할 수 있는 딸자식으로부터 버려질까 봐...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엄마는 요양병원은 끔찍하다고 했다. 버려지는 것 같다고... 그 맘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가 안쓰러우면서도, 대소변 수발까지 해야 하는 나로서는 점점 엄마를 감당하기가 버거워졌다. 자식 된 도리와 책임만으로 하는 간병은 몸 말고도 정신까지 무너지게 했다. 엄마와 동일한 병을 앓았고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죽음 직전에 그럴듯한 유언 같은 건 없었다. 마지막까지 생의 미련과 아쉬움을 토로하다가 떠나셨다. 나에 대한 미안함은 없었다. 사실 그 점이 감사하다.
이따금 엄마 생각을 한다. 영정사진 속 60대 초반에 엄마는, 양손을 단정하게 모으고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가끔 그 사진 앞에서 이야기도 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엄마가 나에 대한 미안함이 없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저 노구를 잠식해 버린 고통이 너무 커서 딸년의 생을 돌아볼 만큼 여유가 없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명줄을 붙이고 있는 게 구차스러운 순간에도 생의 미련은 있는 법이다. 곧잘 쉽게 내뱉는 ' 생의 미련이 없다' 란 말은, 그저 견딜 수 있을 만큼 건강한 날에나 할 수 있는 입빠른 소리일 뿐, 코 앞에 죽음이 닥친 상황에서는 결코 쉽게 꺼내놓을 수 없는 말이란 걸 그때 알았다. 몰핀도 소용없을 때조차,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엄마는 살고 싶어 했다. 엄마의 84번째 여름이 한창일 때, 미련을 남긴 채 마지막 배웅을 했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꼬꾸라졌다. 드디어 혈연으로부터 풀려났다는 해방감, 그 홀가분함은 몇 년 만인지 모르는 깊은 잠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런데, 생각했던 것처럼 내 일상은 건강한 상태로 돌아오지 못했다. 더 깊어진 우울감과 죄책감이 일상을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빛 하나 들리 않는 어두운 터널은, 예상치도 못한 펜데믹으로 진절머리 나게 이어졌고 그 매일매일은 엄마를 돌보던 시간, 그 죄스런 순간에 맞춰져 있었다.
' 제발 이쯤에서 떠나셨으면... 끝내 내가 먼저 죽어야, 이 양반이 가시겠구나 ' ' 부모 케어를 언제까지 자식 인생을 담보로 해야 하나 이 눔의 망할 놈의 나라 ',,,, 나조차도 보기 싫은 내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끈질기게 응시하는 시간들... 그렇게 또 자책과 죄책감으로 하루 해가 뜨고 저물었다. 그 시간으로부터 돌아서 나올 재간이 없었다. 그저 매일매일 땅굴을 파고 또 파고 들어가 앉아 있는 일밖에는, 마음처럼 다른 길을 찾을 엄두를 낼 수도 나지도 않았다. 거기서 빠져나오는 시간이 팬데믹 기간만큼이나 오래 걸렸다. 사실 지금도 상태가 완전하지는 않다. 그때에 젖은 우울감이 일상을 덮칠 때도 있다. 그래도 그때와 다른 변화라면, 지금은 스스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점이다.
' 그래,,,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지.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시간에조차 무리해 최선을 다 했어....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힘든 순간에도 말이야.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들만도 했어. 세상에 모든 자식이 너처럼 하기 쉽지 않아. 이쯤에서 너를 보듬고 용서해.... '
엄마 방은 햇살이 참 좋다. 그곳에 앉아 차를 마신다. 이제 와서야 살아 계실 때 하지 못했던 속엣말을 꺼내 놓는다. " 엄마, 그때 그런 못 돼먹은 맘 품었던 거 죄송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