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담에 며칠 전부터 이름 모를 꽃이 폈다. 연 보라색의 꽃잎을 가졌는데 특이하게 이파리가 하나도 없었다. 사실 워낙 꽃잎이 화려해서 몇 번을 지나치면서도 잎이 없는지 알지도 못했다. 소박한 동네에 피어있기에는 지나치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피치 못할 사연으로 인해서 시골로 도망쳐온 부잣집 아씨 같은 같달까. 아니나 다를까 집에와서 검색해보니 관상용으로 키우는 수선화의 일종이란다. 꽃이 필 때는 잎이 다 지고 잎이 날 때는 꽃이 없는 특징을 가졌는데 영원히 같이 잎과 꽃이 존재하지 못해서 서로를 그리워하다 죽는다고 하여 '상사화'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 이름 마저 아련하고 사연있는 셈이다. 이름의 사연을 알고 난 이후로 그 꽃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연민 같은게 느껴진다. 큰 꽃잎 탓에 조금 휘어져 있는 꽃대가 더 안쓰럽고 이미 다 져버린 잎의 자리가 야속하기만 하다. 인간으로부터 본인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평생 남을 그리워하는 생물로 불릴 이 꽃의 운명이 얄궃다 생각했다.
'이름'이라는 개념은 참 미묘하다. 생물학적으로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철저하게 사회적인 영향만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어떨땐 생물학적인 것들보다 더 강렬하고 영생적으로 나에게 종속된다. 오죽하면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할까. 문화권에 따라서 다르지만 한국에서는 이름으로 인하여 운명이 바뀐다고 믿기도 한다. 삶이 잘 풀리지 않는 것이 이름 때문이라며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성격에도 결부시키기도 하며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이름과 연관시켜서 판단하고 결론 짓는 셈이다.
그렇게 이름에 많은 의미를 부여 하는 우리가 누군가와 사랑을 빠질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다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부여받았던 이름을 대신하여 둘만이 공유 할 수 있는 새로운 명사로 서로를 부른다. 자기, 당신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돼지, 병아리 등 세상 귀여운 것들부터 깜찍이, 귀염이 등 형용사도 마다하지 않는다. 상대를 가장 아름답게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상관없다. 아주 작은 장점들로부터 기인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단점마저도 상대의 눈빛 속에서는 아름답게 보인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던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우리 관계 속에서 서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주길 원하는 의지를 반영 시킨다. 나의 작은 아름다움이 되어주길. 나에게 만은 부드러움이 되어 주기를 말이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며 새롭게 태어난다. 애정이라는 이름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이다. 결국 사랑은 상대를 새롭게 명명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