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점심 문화 '메뉴델디아', 마드리드
여행 스타일이 확고한 편이다. 배불리 먹는 것 대신에 낯이 설은 장면을 눈에 많이 담는 것, 여러 도시를 경험해 보는 것 대신에 한 도시에서, 언제든 돌아갈 집이 있고 가족이 있는 사람처럼 머무는 것이 좋다. 또 알아주는 길치이지만 가능하면 대중교통보단 걷는 편이 좋다.
2월의 마드리드는 장장 열두 시간을 날아왔어도 날씨만은 타향 같지 않았다. 잘못 스치면 쩡 소리를 내며 깨져버릴 것 같은 다리로 신나게 걸었던 기억. 식도락에는 큰 흥미가 없지만, 버석한 빵으로 식사를 때우며 여행하다 보니 나흘 지나고선 집밥이 그리워졌다. ‘거지여도 유럽 거지는 낭만 있다.’는 친구의 우스갯소리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떤 날엔 눈을 뜨자마자 정말 맛있는 한 끼를 먹어야겠단 다짐을 했다.
저녁을 비교적 늦은 밤중에 먹는 스페인 사람들에겐 낮동안 든든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자리 잡은 특별한 식문화 메뉴델디아. 직역하면 ‘오늘의 점심’이다. 전채, 메인, 디저트로 구성되어 있고 각 코스에는 몇 가지 옵션이 있어서 입맛에 맞게 주문하면 된다.
점심 메뉴를 사냥하던 중에 발견한 반가운 메뉴 보드. 큰 도로가 두 갈래 길로 나뉘는 길목에 자리한 아담한 레스토랑이었다. 정갈하게 적힌 글씨와 가격이 마음에 들어 냉큼 들어갔다. 폭은 그렇게 넓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의외의 공간이 계속 반기는 곳, 나는 2층에 자리를 잡았다. 손님들은 소박한 옷차림에, 서두르지 않는 분위기였다.
해외여행 중 메뉴 선택권은 나보다 번역기가 쥐고 있는 편이라 해야 옳다. 엉성한 번역에 의존해서 주문한 음식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일 때가 왕왕 있지만, 그것도 나름의 묘미이다. 나는 ‘혼합 샐러드’, ‘마드리드식 삼겹살’, ‘쌀푸딩’ 일 수도 있고 영 딴판일 수도 있는 음식을 주문했다.
주문한 지 1분이 채 안되어 전채 요리가 나왔다. ‘Ensalada mixta’는 예상한 것과 꼭 닮은 음식이었다. 쾌속으로 나온 만큼 채소는 신선했고 참치와 올리브 절임이 잘 어울렸다. 스페인은 세계에서 꼽히는 올리브 생산국인만큼 어느 레스토랑을 가든 질 좋은 올리브 오일을 맛볼 수 있는데, 발사믹 식초와 오일을 조금 둘러 먹으니 채소의 맛이 더 풍부했다. 테이블에 놓여 있던 브랜드와 같은 오일을 돌아올 때 사 왔다.
따로 요청하지 않아도 적당히 다 먹고 나면 다음 음식을 내어주셨다. 마드리드식 삼겹살이라기에 구운 고기가 나올 거라 예상했는데, 빨간 국물의 스튜가 나왔다. 심지어 돼지가 아니라 소고기였다. 2단 변신에 놀랐지만 평소 내 선택으론 주문할 것 같지 않은 음식이라 반가운 마음이었다. 찾아보니 ‘Callos a la madrilena’는 소 내장, 족발, 초리소, 모르시야 등을 넣고 끓인 국물요리라고 했다. 국물은 걸쭉하고 기름기도 느껴져 겨울에 종종 생각날 것 같았다. 식전 빵을 찍어 먹으니 든든했다.
후식으로 나온 ‘Arroz con leche’의 첫인상은 뽀얀 푸딩 위에 시나몬 가루가 잔뜩 올라가 있어, 호불호가 있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잔뜩 기대하며 한 숟갈 푹 떴는데, 생쌀이 들어있었다. 쌀 푸딩이란 것이 말 그대로 쌀이 들어간 푸딩이었다. 달달한 푸딩 안에 생쌀이 씹히는데, 쌀을 주식으로 소비하는 한국인에게 달달한 쌀이라... 난도가 있을 것이다. 먹다 보니 정이 가는 맛이었지만 두 번째 만남은 없을 것 같다.
이날을 자꾸 떠올리니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있던 두 중년이 생각난다. 작업복 같은 어두운 계열 슈트에 페인트 얼룩이 알알이 찍혀있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메뉴를 주문하고 앉아서 맞은편 티브이를 보고 간간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누군가에겐 지독하리만큼 평범한 날이 누군가에겐 이렇게 한 바닥 글을 써 내려갈 만큼 새롭고 특이한 경험이라니, 나는 며칠 뒤면 떠나지만 이들은 몇 개월 뒤의 어느 날에 이곳에 들러 점심을 먹겠지, 그땐 다른 메뉴를 먹으려나. 이런 생각을 한참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건, 다음 마드리드 여행이 있다면 다시 찾고 싶은 레스토랑이었다!
Restaurante Rias Altas, Madrid, Sp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