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이야기해야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

by 수련


과거 수렵채집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던 우리 조상들은 가족과 동료의 죽음을 비교적 쉽게 목격할 수 있었고, 그렇기에 죽음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풍부한 의학적 자원 속에서 더 건강하고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주위에서 목격하기 힘든 일, 그렇기에 더욱 무겁게 애도해야 하는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의학의 힘으로 죽음을 연기할 수 있게 된 현재, 애석하게도 우리는 건강에 더욱 집착하고, 생전에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부와 번영을 위해 경쟁한다.


죽음을 소재로 하는 뭇 소설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공포와 이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현세에 과하게 집착하는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일리치는 사회적 위신과 겉치레에만 집중하며 살던 인물이다. 그는 공적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자기 모습을 통해 자존심을 채웠고, 더럽고 가식적인 일이란 걸 알면서도 사교계 생활을 늘 가까이하며 허영심을 채웠다. 인사이동으로 높은 자리로 승진하고 연봉이 인상되었을 때 역시 자신에게 굽신거리는 주위 사람들에 흡족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응접실을 단장하던 그가 실수로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난 뒤 옆구리 통증이 시작되면서, 여태껏 손에 쥐고 있던 모든 사회적 명성과 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에게 허영심과 자신감을 채워주던 모든 물질적인 것들은 점차 허무함과 공허함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변했다. 아무리 저명한 의사가 그를 내진해도 그 흔한 옆구리 통증의 원인이나 병명조차 알아내지 못했고, 결국 일리치는 죽기 직전까지 불명의 옆구리 통증을 안고 그의 집 병상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작가는 일리치의 죽음의 원인을 의학적으로 조명하지 않으면서, 사실 그를 집어삼킨 병은 맹장도 다른 병도 아닌 ‘죽음에 대한 공포’ 그 자체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리치는 경주마처럼 내달리며 눈앞의 목표에 몰두하면서도, 그렇게 쌓고있는 것을 언젠가는 다 놓아야 한다는 막연한 공포감 속에 살아왔을 것이다. 말로에는 주변 사람들을 통해 오직 자신의 안위밖에 몰랐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아픈 자신을 성가시게 대하는 가족으로부터 성공만을 향해 나아가며 정작 가족에게 소홀했던 모습을, 자신을 진찰하는 의사로부터 법정에서 권위를 휘두르던 냉정한 모습을 마주한다.

브뤼헐의 <이카루스의 추락이 있는 풍경>

농부는 묵묵히 밭을 갈고, 선박은 자신의 선로를 따라 나아가고 있다. 작품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제야 바다에 이미 반쯤 잠긴 채 허우적대는 이카루스를 찾을 수 있다. 추락하는 사람 주변부에 의해 도리어 평화롭고 일상적인 느낌을 주는 이 작품은, 어떤 이가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모든 주체는 각자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말로를 맞이하는 이카루스를 보면 일리치가 떠오르지 않는가. 죽음의 구덩이로 추락하는 일리치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죽고 난 뒤에 얻게 될 국가 지원금이나, 회사 내 승진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언젠가 자신도 이카루스가 될 운명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 말이다.

결국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해야만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죽음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불확실하고 모호한 사건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가 향해가고 있는 가장 명확한 진리이다. 그러니 일리치의 부엌 하인 게라심처럼 죽음 앞에 초연하자. 그리고 그것이 주는 깊고 아득한 감정에 개의치 말자. 그것이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만큼 가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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