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 본능을 고발하는 법, <나라야마 부시코> 해석

빈곤의 시대, 식구(食口)와 효(孝)를 통한 인간 본능에 대한 고찰

by 무형


Review note


영화 《나라야마 부시코》(1983)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

출연 오가타 켄, 사카모토 스미코, 바이쇼 미츠코

원작 후카자와 시치로 - 소설 《나라야마 부시코》, 《동북의 신무들》



눈이 오는 날 산에 가면 복을 받는다네⋯⋯ 오린 할매는 복 받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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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감상 후 읽기를 추천합니다. 스포일러 무관히 해석을 중점으로 두었습니다.)


견고한 작품성과 날것의 묘사에 충격을 받은 작품. <나라야마 부시코>는 영화는 노인을 주제로 한 영화를 수집하다 알게 됐다. 다만 내가 느끼기에 이 작품은 인간의 불가피한 야만성 그리고 자연의 섭리에 대해 좀 더 초점을 맞춘 듯 하다. 빈곤 속 생존을 위해 가져야만 했던 비인간성에 대해서.


일본. 에도시대 말기 배경의 도코후 산골 마을. 이곳에는 70살이 되면 ‘나라야마 산신’님을 만난다는 제하 아래 산에 가야 하는 전통이 있다. 그러나 모두들 은연 중에 알고 있다. 이는 불필요한 식구(食口) 하나를 줄이려는 고려장과 다를바 없다는 사실을. 영화는 빈곤의 시대를 시사한다. 즉 생존과 실효성 있는 인력의 번식이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전제로 한다. 마치 짐승의 생애주기와 다를바 없이, 사람이 본능대로 살아가며 생을 마감하는 자연의 섭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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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첫째, 들짐승들의 인서트 컷.


작중에는 끊임없이 산 속의 야생 동물들이 등장한다. 뱀, 개구리, 너구리, 사마귀 등속은 마구잡이로 번식하고 먹잇감을 물어 뜯으며 생존한다. 특히나 각종 교미 장면은 계속해서 마을의 여자들과 정사를 하는 장손 ‘케사키치’와 오버랩된다.

행위는 본능적이며 생생하다. 이는 규칙에 순응하게 된 ‘오린’ 할머니와의 대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아직 철이 덜 든 인물로 하여금 어린 짐승의 특성을 보여주고, 각 인물의 나이대별로 취하는 행동양식 또한 자연의 섭리에 포섭되어있음을 암시한다. 작품 밖 시대가 1983년임을 감안하면 문명화 이전을 배경으로 설정함으로써 이를 의도했음을 더 명백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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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둘째, 쓸모의 증명.


다음과 같은 대사가 쓰인다. “너도 장남이 아니잖아! 언젠간 나처럼 될걸!” “여자애로 태어나면 좋겠어. 그럼 죽이진 않고 팔 수 있으니까.” 전자는 차남이자 삼촌인 리스케의 말이고, 후자는 케사키치가 여자친구 ‘마츠야’와 태어날 아이를 기대하며 하는 말이다.

1) 리스케는 마을에서 말 그대로 ‘등신’ 취급을 받는다. 엄마와 형에게만 제대로된 이름으로 불리우고 보통은 구린내로 퉁쳐진다. 이 네이밍은 비단 리스케의 실질적 능력, 즉 생존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성향(게으름, 낮은 지능) 뿐만이 아니다. 못생기고 해결할 수 없는 구취로 마을의 모든 여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즉 단순히 ‘못났다’에서 그치지 않고 노동력의 상실과 더불어 번식력의 상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더더욱 정사에 집착을 하다 오린의 부탁으로 동네의 나이 든 할머니와 관계를 갖기도 한다.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2) 케사키치는 아이가 여자이길 기대한다. 작품 및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여성은 곧 노동력으로 취급된다. 이 현상은 한국의 역사와도 유사하다. 식솔을 줄이기 위해 동생들을 돌볼 나이가 아니거나, 혹은 그다지 예쁘지 않은, 애매한 역할의 여아를 다른 부유한 친척네 식모로 보내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인 셈이다. 작중에서 여자들은 노동력 혹은 성적 해소 도구 그 자체로 사고 팔린다. 분명 근본적으로 하등한 대우를 받는데 아이러니하게 그래서 생존할 수 있는 지점이 흥미로웠다. 이는 영화의 비주류적 메세지이나, 이후 다른 작품과 엮어 논점으로써 확장될 여지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처럼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가치를 묻는다. 노인을 포함하여 노동력이 없는 주체는 곧 버려지고 만다. 사실 작품이 명작으로 회자되는 이유는 아직까지도 존재 증명과 노동력을 떼어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부족이 마을이 되고 마을이 도시가 되었을 뿐. 유구하게 생산성이 없는 인간은 존중받지 못하는 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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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셋째, 먹을 입.


식구(食口)의 기원은 바로 식사를 같이 하는 사람들이다. 감독 이마무라는 식구의 개념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밥 먹을 거야.” 철딱서니 케사키치는 여자친구가 바뀔 때마다 꼭 본인의 집에서 식사를 시킨다. 이 행위는 한 가족이 된다는 암묵적인 공표다. 동시에 가족 구성원의 변동은 생존에 위협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빗물집 몰살 사건과 문제의 고려장이다.

케사키치의 첫 여자친구 ‘마츠야’. 빗물집 장녀로 밤일만 잘하지 생활력이라곤 없는 게으른 사람이다. 다른 식솔들이 열심히 지어놓은 밥을 축내기만 한다든지 노동은 커녕 케사키치와 웃고 노니느라 그야말로 시댁의 짐이 된다. 그런데 이런 마츠야가 설상가상으로 케사키치의 아이를 임신하고 시댁의 식량을 본가에 훔쳐가기까지 한다. 그렇다. 이미 빗물집 식구들은 선대부터 유구하게 도둑질로 먹고 살았던 집안인 것. 이를 눈치 챈 오린은 집안의 안녕을 위해 그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린다. 마을 공동체는 빗물집 식구들을 몰살하고 그들이 훔친 식량을 나눠 갖는다.

영화에서는 계속해서 ‘먹을 입’에 대해 이야기한다. 먹을 입이 곧 늘어나니 그만큼 줄일 필요가 있다는 둥, 어차피 또 증손주는 태어나니 먹을 입은 생긴다는 둥. 그야말로 인간 생존의 목적이 더 고양화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생존 그 자체에 머문다. 당장 먹고 살 수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다른 것은 사치에 불과하다. 그나마 즐길 수 있는 쾌락이라곤 정사 뿐인데, 그마저도 결론적으로 식구를 늘리는 행위가 된다.


주인공 ‘오린’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본인은 이제 쓸데없는 ‘먹을 입’이라는 사실 또한. 하여 멀쩡한 이빨을 돌로 부숴 깨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기행을 부리는 등 아직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갖고 있음에도 마땅히 버려져야 할 이유를 만든다. 이런 과정은 가족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본인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독한 자기암시가 있어야만 이 지옥을 그나마 견딜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오린은 일흔이 되고 나라야마 산신을 뵈러 간다. 아들 ‘타츠헤이’와 고행길을 함께하며. 이 부분에서도 흥미로운 연출 두 가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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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등반 시 대화 금지


전통에는 규칙이 따른다. 사실상 동의어라고도 본다. 이는 산신님을 뵈러 가는 길에도 마찬가지다. 마을의 노인들은 의식을 치르기 위해 타츠헤이에게 몇 가지 주의점을 알려 준다. 그 중에는 ‘등반 길에는 대화를 금할 것’의 조항이 있다. 사실 진짜 이유는 대화를 하는 도중에 옛날을 회고하게 되고, 하여 가족 간의 정이나 도리를 상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고려장을 실패하고 돌아올까봐서라고 생각한다. 명목은 그럴듯하게 포장했지만서도.


이러한 이유로 규율에 순응하는 두 모자, 오린과 타츠헤이는 (특히 오린 쪽이) 절대 입을 열지 않는다. 이로 인해 영화적으로는 무척 아름다운 장면이 연출되는데, 바로 무성영화의 느낌을 주면서 관객을 시각적으로 집중하게 한다. 산 속을 계속해서 헤쳐나가며 두 사람이 마주하는 풍경은 생소하다. 낯선 만큼 신비롭고 동시에 두려워지기도 한다. 감각을 곤두세우게 되는 장치를 느껴보고 싶다면 해당 장면을 반드시 시청하길 바란다. (조용한 공간에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것을 추천한다! 팝콘의 바삭바삭한 유혹도 잠시 넣어 두고.)

2) 눈(雪)


“눈이 오는 날 산에 가면 복을 받는다네⋯⋯ 오린 할매는 복 받았네.”


타츠헤이는 부실한 남자다. 겉보기에는 가장 상식적이고 믿음직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만큼 정이 많고 마음이 여리기도 하다. 사람의 장단이란 늘 함께함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성향이다. 그리하여 사회에 온전히 순응하기도 하고 (일테면 ‘말 잘 듣고 착한 아이’처럼) 동생 리스케를 엄하게 타이르는 것 같아도 아내의 앞에선 동생을 위해 지질한 부탁을 하며 체면을 구기기도 한다. 오린을 대할 때도 일맥상통이다. 누군들 부모를 쉽게 유기할 수 있겠냐만은, 본인의 고려장을 자진하다 못해 닦아세우는 오린에게 등쌀이 밀리고 만다. 아마도 사회적 역할 수행을 충실히 하려는 그의 성격도 한몫 했을 것이고. 결국 고려장을 받아 들인 타츠헤이는 한 마디 남긴다. “엄마 가시는 날에 눈이라도 오면 좋겠네요.”


그리고 정말로 눈이 내린다. 오프닝과 수미상관되는 흰 눈발이. 한 잎씩 떨어지는 눈송이는 그 자체로 경이로움과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선사한다. 소복하게 쌓인 눈 속에서 부처상처럼 손을 모으고 기도를 드리는 오린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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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야라 부시코는 계속해서 인간 증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대적 배경으로 말미암아, 생존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설정이 이를 극대화 시킨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야만성과 운명적 순리가 돋보이게 된다.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든다. 결국 이 거대한 삶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며 존중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언젠가 우리는 그런 강제성에 구애받지 않는 생을 살 수 있을까. 끊임없는 존재 가치의 증명, 그것을 마을의 고려장으로 풀어낸 작품이었다. 때론 적나라하고 때론 그렇기에 아름답기 짝이 없는 묘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