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물고기들의 세계에서, ‘내 편’이 있던 기억을 떠올리며
지금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기억하는 여름은 할아버지가 방학숙제로 가재를 잡아준 일이었다. 칠순을 막 맞이한 할아버지께서는 아직도 까무잡잡하게 건강한 피부와 풍채를 갖고 계셨다. 초등학교 삼 학년 때의 일이었는데. 그때 학교에서는 공용 수족관에 넣을 수중 생물을 하나씩 데려오라고 말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정말로 이십 여년 전에나 내줄 수 있던 과제 같다. 근래의 초등학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과거보다는 더 세련됐고 동시에 책임질 일을 만들지 않는 듯하다는 것이 나의 감상이다.
할아버지는 물에서 살 수 있는 거면 뭐든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나를 데리고 망우산으로 가셨다. 서울 한구석에도 골짜기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특유의 바랜 녹빛과 이끼가 듬성듬성한 풍경이 있었다. 머리 위로는 여름의 이름 모를 푸른 이파리들이 뾰족뾰족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던 기억이 있다.
나는 멀리서 무릎을 걷고 덤펑덤펑 들어가 내 이름을 부르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아직도 오십 몇 세에 가깝게 보였던 그는 머잖아 새끼 가재 몇 마리를 들어 보이셨다. 손녀 방학 숙제로 그렇게 민첩하게 물 속에 떠다니는 걸 잡는 조부가 있었으려나. 떠올려 보면 한참은 젊으셨다.
그런데 사달은 일주일 후에 터졌다. 당시 같은 반 남자애들이며 목소리 큰 여자애 몇몇이 다가와 모두 나 때문이라고 질책을 해댔다. 영문도 모르고 닦아세우는 애들을 따라간 나는 복도의 중앙에 놓인 대형 수조에서 허리가 잘린 금붕어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집 애들은 이마트며 우림시장의 펫수족관이며 하여튼 이제 막 서른 중반이 넘었을 법한 엄마 아빠가 사준 고기들을 넣어놨다. 나와는 달리.
야생에서 온 가재는 본능대로 눈앞 고기의 뼈를 부러뜨렸고 결국 그 작은 생태 안에는 나의 가재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무언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달리 할아버지께 말씀드리지는 않았다. 동시에 가재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원래 그렇게들 사는 놈들 아니던가. 또한 곤혹을 그대로 할아버지께 전달해드릴 생각도 없었다. 물론 철이 든 지금에야 떠올리는 마땅한 이유일지도 모르고.
그리고 내가 반장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언덕 건너 모닝글로리에서 여아용 엠보 필통 열 다섯 개. 그리고 남아용 스무 개를 사서 한 무더기로 들고 오셨다. 눈이 작고 코가 큰 분홍색과 파란색 털의 곰돌이가 그려진 디자인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낡아빠진 적립용 카드의 전면에서만 그 캐릭터를 볼 수 있다. 실속만 있으면 그만으로 여기던 만큼 할아버지께선 농협 하나로 마트의 커다란 비닐에 물건을 차곡차곡 담으셨는데 나는 어쩐지 그 투박함이 부끄러워졌다. 다른 집 엄마들이 해주는 것처럼 백화점 종이백 혹은 그럴싸한 타포린 백에 선물을 담길 원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담을 가방을 바꾼 끝에 울음기 섞인 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곤란한 표정은 지어도 음성을 높이는 법이 없으셨다. 그럼 어떻게 하라고. 그때에도 그는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리시면서 말에 있는 가시라곤 모두 삼켜, 마치 그쪽이 더 잘못을 한 사람처럼 구셨다. 나는 경상도 사투리가 거칠다는 것을 그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알았다.
25년 2월 10일. 기일이다.
나는 내가 조침이 많은 아이인 줄 몰랐는데 그건 다 매일 아침 수건에 뜨거운 물을 적셔 얼굴을 하나하나 닦으며 깨워줬던 할아버지 덕분이었다. 나는 스물 여덟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팔십 팔 세로 다시 있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아직도 책상의 한구석에는 할아버지의 운전면허증이 있다.
망우동 119 센터에서 지진 대피 교육을 받을 때 함께 머리를 감싸고 키득거렸던 것도 할아버지다. 예쁘게 깎은 밤과 발라놓은 생선살만 주신 것도 할아버지였고 딸기의 꼭지까지 모두 도려내 씻어 주는 것도 그였다. 내 턱뼈 관절에 알 수 없는 염증 덩어리가 생겼을 때 꿈 속에서 그것을 데굴데굴 굴려 입 밖으로 쏙 꺼냈다던 분도 역시 그다. 매일 같이 아스팔트 언덕길 끝과 끝까지 나를 등교시켜 주고 하교 시켜주었던 이도. 죽은 둘째 딸이 제 손녀에게 사주었던 애나멜 소재의 바비 인형 가방을 망설임없이 어깨에 걸친 이도. 한여름에도 손에 땀이 날 때 까지 손을 쥐고 걸었으며 밤에 무섭다며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 칭얼댄들 구신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며 끌끌거렸던 이도. 그리고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손녀딸이 오줌을 누는 동안 잘 닫히지 않는 나무문을 등으로 밀고 계셨던 이도.
내가 다 큰 어른이 돼도 늦잠을 자는 내 머리맡에 어디에 다녀온다며 메모지를 남겨놓고 가던 사람도. 이름 대신 예쁜 사람이라는 말로 나를 더 많이 불렀던 사람도 그다.
곧 있으면 일 년이 된다. 나는 종종 두렵다. 나이가 들며 그가 베푼 귀한 사랑 중 하나라도 잊게 돼버릴까 봐. 게에게는 항상 가재가 있었다는 든든함을 잊어버릴까 봐.
마모 되지 않게 글을 남긴다. 11월 10일. 정확히 구 개월이 지난 건 오늘 깨달았다.
작년 11월 10일.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했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