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차장의 홈파티

21년 차 고인 물의 오후 반차, 그리고 뜻밖의 '존버' 승리 선언

by 기억하는 나비

평일 오후 2시. 회사 로비를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남들 다 일하는 시간에 누리는 '반차'의 맛. 직장 생활 21년 차, 산전수전 다 겪은 '고인 물'에 번번이 승진 미역국을 마시고 있는 '만년 차장'에게도 이 순간만큼은 짜릿한 일탈이다.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다. 집으로 귀한 손님들을 초대했다. 한창 일할 시간에 즐기는, 이름하여 '긍정적인 낮술 파티'다.


멤버는 단출하다. 나, 그리고 직장 후배 한 명,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인 휴직 중인 동료 K다.

K는 나와 산전수전을 같이 겪은 동지다. 그녀는 1년 전, 회사 내 특정 인물과의 극심한 갈등으로 결국 휴직계를 던졌다. "차장님, 저 진짜 숨이 안 쉬어져요."라며 울먹이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건 21년 차 고인 물로 써도 참담한 일이었다.


띵동.


경쾌한 벨 소리와 함께 그녀들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K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지만, 여전히 눈빛 한구석엔 그늘이 있었다. 복직이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다시 그 전쟁터로, 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


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아껴두었던 나파 밸리 레드 와인을 오픈하고(낮술엔 역시 묵직한 레드다), 배달 온 피자와, 치즈, 샐러드, 그리고 급하게 만든 파스타로 식탁 가득 차렸다.


"선배님, 이거 완전 호사인데요? 평일 낮에 와인이라니!"


후배의 호들갑에 분위기가 조금씩 풀렸다. 와인 잔이 부딪히고, 붉은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조금씩 긴장이 풀어지고 있었다.


"아 맞다! 대리님, 굳 뉴스가 있어요. “

후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폭탄선언을 했다.


"그 직원, 이번 달에 퇴사한대요. 사표 냈대요."

"진짜... 야? 정말 그 직원이 나간대?"

"네, 진짜요! 이미 결재 다 올라갔대요."

와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지독했던 갈등,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이 당사자의 자진 퇴장으로 허무하리만치 쉽게 종결된 것이다. K가 휴직을 마치고 돌아가면, 그곳에 버티던 '빌런' 1명이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월드컵 4강이라도 진출한 사람들처럼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조금 전까지 무겁게 가라앉았던 와인 파티의 공기가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흥분한 K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와인 잔을 채웠다. 21년 차.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나 역시 회사에서 별의별 꼴을 다 봤다. 죽도록 미운 상사, 뒤통수치는 동료,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승진까지.


'그래,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더니.'


K의 승리는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만년 차장이라는 꼬리표가 부끄러워 밤잠 설친 날들도 있었지만, 오늘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대혼란의 인공지능 격변기. 하루아침에 내 자리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불안한 시대에, 그래도 매달 월급을 주는 직장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마음 맞는 동료들과 낮술 한잔 기울이며 웃고 떠들 수 있다는 것. 이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결심했다. 승진에 대한 미련은 이제 그만 와인과 함께 삼켜버리기로. 대신, 이곳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오늘 같은 '뜻밖의 승리'를 맛보는 기쁨을 누리기로.


"자, 다시 짠! K의 귀환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모두의 '긍정적인' 회사 생활을 위하여!"


평일 오후 4시. 창밖의 햇살은 눈부시게 따뜻했고, 우리의 와인 잔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경쾌한 소리를 냈다. 빌런은 사라지게 되었고,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보다 더 완벽한 홈파티가 또 있을까.


아 맞다. 와인 3병으로만 끝났으면 완벽했을 파티..... 술꾼도시 김 차장의 2차 선언만 없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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