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 2등 딸의 '6광탈', 그리고 속 편한 숙주나물

엄친딸이 N수생이 된 이유

by 기억하는 나비

오늘 도시락의 주인공은 '숙주나물'입니다. 흔하디 흔한 반찬이지만, 오늘만큼은 제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하다며 소화제를 찾는 딸을 위해, 콩나물보다 소화가 잘 되고 가스가 덜 찬다는 숙주를 일부러 골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딸은 소위 말하는 '엄친딸'이었습니다.

학창 시절 내내 상위권을 놓친 적 없었고, 모범생이라는 단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아이도,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2025년이면 이 지긋지긋한 입시가 끝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입시의 문턱은 생각보다 높고 잔인했습니다.


2007년생, '황금돼지띠'아이들이 치른 이번 입시는 유독 치열했습니다. 아이가 많으니 경쟁률은 치솟았고, 불운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수시 6곳 지원, 결과는 '6 광탈(6곳 모두 탈락)'.


합격자 명단에 없다는 화면을 여섯 번이나 마주했을 때, 아이의 마음이 어땠을지 저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무너질 법도 한데, 딸은 의외로 담담하고 단단했습니다.

정시 원서를 쓰는 대신, 아이는 "재수해서 한의대에 가겠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어설프게 점수에 맞춰 대학을 가기보다, 1년을 온전히 투자해 진짜 꿈을 꾸기로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저의 2026년 계획도 전면 수정되었습니다.

'수험생 학부모 졸업'은 1년 뒤로 미뤄졌습니다. 대신 우리는 서로에게 굳은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너는 치열하게 공부를 해. 엄마는 치열하게 뒷바라지를 할게."


그렇게 우리 모녀의 '더 열심히 사는 1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새벽 6시마다 일어나 서툰 칼질을 하는 '5-Star Chef'가 되었고, 딸은 매일 아침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독학재수 학원으로 향합니다.


오늘이 그 여정을 시작한 지 10일째(D+10) 되는 날입니다.

긴장감 때문인지 자꾸만 배에 가스가 찬다는 딸을 위해, 저는 오늘 아침 콩나물 대신 부드러운 숙주를 데쳤습니다. 딱딱한 콩 머리가 없는 숙주나물처럼, 아이의 뱃속도, 그리고 앞으로의 수험 생활도 걸림돌 없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요.


"오늘은 아삭한 숙주나물! 속 편하게 먹고 오늘도 힘내자! 사랑해 ♡"

숙주나물 사진.jpg

쪽지에 적은 '속 편하게 먹고'라는 말에는, 밥뿐만 아니라 '마음도 좀 편하게 먹으라'는 엄마의 응원을 숨겨두었습니다.


전교 1등에서 N수생으로, 그리고 예비 한의대생으로.

이름표는 바뀌었지만, 제 딸은 여전히 저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멋진 아이입니다. 비록 시작은 '6 광탈'이었지만, 그 끝은 찬란한 '합격'이 되리라 믿으며 저는 오늘도 도시락 뚜껑을 닫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워킹맘 셰프의 수능 마라톤, D+305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