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애기가 제법 많군요, 처음이라 그런지.
(1) 사람됨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에게 공순한
사람 가운데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는
이는 없다.
(2) 윗사람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가운데
난을 일으키기 좋아하는 자는 없었다.
'효/제 → 충'으로 이어지는 얼핏 보면 이해가 가나
계속 읽으면 왠지 기분 묘해지는 그런 구절입니다.
왜 후한 시대에 동중서 및 그 당시 '정권'이 유학을 통치 철학의 근간으로 삼았는지의
이유가 위의 두 구절에서 출발했다고 하면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일까요?
난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을 기본적으로 지배계급에서는 원합니다.
그런데 난을 일으키면 안된다고 기득권 및 지배계층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당근과 채찍도 한계가 있겠지요)
그래서 부모와 형제 간의 도리와 행할 바를 통치자에 대한 순종 및 복종의 근거로
묘하게 이어 놓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위의 명제를 반대로 뒤 짚으면 윗사람에게 난을 일으키는 사람은 효도도 하지 않고 형제 간에 우애도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니, 어째 좀 이상합니다.
수많은 혁명을, 특히 정당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과 무엇보다도 성공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다들 착한 사람들로 알려져 있지 않나요?
효와 제 정도는 그냥 기본으로 깔고 가던 사람들로 포장되어 있지 않나요?
현대 조직 사회에서 그렇지 않나요?
조금 소위 말하는 '개김성'이 투철한 사람들에 대해서 조직에서는 이 사람이 인간적으로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뭐 하나 흠이 나오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어 뜯곤 하지요.
왜 윗선에 '개기게' 되었는지 사건의 본질은 이렇게 되면 그리 큰 의미가 없어지고
이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문제 있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질서가 있어야 하고 상하 간에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만 이런 유교적인 묘한 논리들로 인해 사건의 본질이 가려지는 그런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것을 보면, 문제가 좀 있기는 있습니다.
직분을 다하고 여력이 있으면 문예를 배운다.
본인의 할 일을 제대로 다하고 시간과 열정과 체력이 남으면 다른 것 배워라 정도가 되겠네요.
근데 이러면 현대 사회에서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적당한 선에서 끊고 과감하게 자기계발에 시간 및 돈 투자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