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 본인의 고백이기도 합니다만 - 자전적인 에세이입니다.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쓰는지, 그리고 해외에 왜/어떻게 진출하게 되었는지 등을 담담하게, 특유의 호불호가 분명하지 않은 상대적인 문체로(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흡입력 있게 써 내려갔습니다.
하루키의 에세이/산문을 워낙 좋아해서 꾸준히 사모으고 읽고 있습니다만(5권 사서 이 책까지 4권 읽었습니다) 이 책도 워낙에 좋아서 읽자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게 만드네요. 작가 생활 37년의 내공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훌륭한 책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처음 안 사실입니다만 하루키는 독자들에게는 친구이나 하나 주류(?) 문학계 내에서는 이단아 혹은 비난에 가까운 비평의 대상이자 폄하의 대상이기도 하더군요. 글쎄요, 이 정도의 산문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소설도 정말 훌륭할 것 같은데 뭐 이유는 책에서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원래 출간 목적으로 쓴 글은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썼다고 하는데요, 연재나 강연 등을 통해서 발표한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묶은 것이니 그 부분도 참고하시면 좋겠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좋은 책이고 특히 하루키 소설의 애독자이시라면 한 번쯤은 읽어두시면 작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2 도. 전. 정. 신.
하루키가 미국 출판계에 진출한 것은 80년대 말입니다. 일본이 한창 경제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고 그 당시도 인기 작가였기에 굳이 해외 시장에 나가지 않아도 '돈 되는 일이 많아서' 무리 없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표현을 빌면, 일본에 재미없는 일이 많아서 국내에 머물러봤자 별 볼일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서 그 힘든 길을 택한 것이지요. 말 그대로 도전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과 본인 작품에 대한 비난과 폄하, 평가절하를 납득하기 어려웠던 부분도 크게 작용을 했습니다) 말이 쉽지 만약 그때 하루키가 미국 시장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세계 50여 개 언어로 번역된 작품을 가진, 세계적인 작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 해외진출조차도 그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또 다른 비난과 폄하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했을까요 : 돌아가는 형세를 계산해가며 자기 좋을 대로 확실한 근거도 없이 발언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항상 일정한 수만큼 있는 법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밖에.
#3 오리지낼러티에 대하여
"그런 나 자신의 체험에 따라 생각한 것인데, 자신만의 오리지널 문체나 화법을 발견하는 데는 우선 출발점으로서 '나에게 무엇을 플러스해간다'는 것보다 오히려 '나에게서 무언가를 마이너스해간다'는 작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나 어떻게도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계통을 깨끗하게 해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 관념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즘처럼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 시대에 남들이 아는 것 정도는 최소한 나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지배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책을 쓰겠다고 작심을 하거나 지식 노동자로서 살아가다 보면 더욱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야기하듯이, 사회가 발전할수록 정보의 양은 늘어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더 무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무지의 기준을 유통되는 정보의 총량 기준으로 볼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채널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아는 것이 많아진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늘어나는 양은 훨씬 많기 때문에 무지함의 정도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현실을 받아들이고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하면 잘 활용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일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지식사회에서 소설가이건 일반 지식 노동자들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편집력'이라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루키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런 글을 쓴 것이 아닌가 합니다.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아는 것이 문제라는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덜어내는 지혜를 이야기하는 것일 테고요. '자기만의 오리지낼러티를 가지는 방법은 덜어내는 것이다'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겠네요.
#4 링 위로의 초대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일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문학계처럼 이런 측면에서 타 직업군이 치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관대한 업계도 없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직업이 그렇듯 장기 지속 가능한 소설가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이야기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으로 얼마든지 올라와서 한 판 붙어보자는, 선의의 경쟁을 자극하는 권유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 아닐까요, '누구나 쓸 수는 있지만 아무나 쓰고 살아남을 수는 없다."
# 인상 깊은 문장들
소설 한두 편을 써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러나 소설을 오래 지속적으로 써내는 것, 소설로 먹고사는 것, 소설가로서 살아남는 것, 이건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언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하는 한 모든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것은,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한 넓혀가는 것은,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고유한 권리입니다. 그런 모험심 없이는 새로운 것은 탄생하지 않습니다.
문학상은 특정한 작품을 각광받게 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지는 못합니다.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해나가면 될 것이고 내 쪽은 내 쪽대로 해나가면 된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한 권이라도 더 많은 책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닥치는 대로 읽을 것. 조금이라도 많은 이야기에 내 몸을 통과시킬 것.
제임스 조이스는 '상상력 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떻든 우리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창고'가 필요합니다.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
세계는 실로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능합니다.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
고베항 근처 헌책방에서 영어 페이퍼백을 한 무더기에 얼마, 하는 식으로 사다가 뜻을 알든 모르든 닥치는 대로 와작와작 난폭하게 읽어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