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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창고 Mar 11. 2017

[서평] 노르웨이의 숲 - 무라카미 하루키

* 풍요로운 시대, 고속 성장하는 시대에 중요한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부유하는 삶을 그린 좋은 작품입니다. 방황하거나 비정상적이거나, 또는 둘 다인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섬세하면서도 밀도가 있습니다. 출간된 지 30년 된 작품이나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들이 주는 감동은 큰 울림이 있습니다. 추천합니다.

 

# 무언가를 상실한 시대가 사람들을 상실감에 빠지게 하는가, 무언가를 상실한 이들로 인해 상실의 시대가 만들어졌는가.


주인공인 와타나베와(동경 모 사립대학교에서 연극을 전공하는 68학번 학생입니다) 그의 여자 친구인 나오코(그녀는 와타나베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이나 자살한 기즈키의 여자 친구였습니다)가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나오코는 기즈키의 자살로 인해 일종의 정신 질환을 앓게 되어 대학을 휴학하고 요양소 및 정신병원에서 생활하게 됩니다만 결국 자살로 생을 스스로 마감하고 맙니다. 이외에도 와타나베가 대학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데 대부분이 범상치 않은 캐릭터의 소유자들입니다. 에고이즘 및 나르시시즘의 화신과도 같은 명문가 출신의 나가사와(외무공무원이 됩니다)와 그의 여자 친구인 하쓰미(나중에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얼마 못 가 자살), 와타나베와 같은 연극사 수업을 미도리(와타나베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됩니다), 나오코의 요양소 룸 메이트인, 피아노를 전공한 레이코 등 한마디로 정상은 아닌 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이 됩니다.


'64년 동경 올림픽을 기점으로 외형상으로는 고속 성장을 지속하던 일본 사회의 한 꺼풀을 더 벗기고 들어가서 상실감과 우울함이 만연했던 시대를 캐릭터를 젊은이들을 중심의 캐릭터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그려낸 수작입니다. 저자 자신이 와세다대 제1문학부 68학번인데, 주인공인 와타나베를 통해 본인이 경험한 60년대 후반 당시 일본의 사회 분위기를 담담한 필체로 풀어갔습니다.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인 셈입니다. 김영하 작가가 그의 산문집 '말하다'에서 '요즘 한국 순수문학의 주인공들은 관습적으로 음울하다'라고 했습니다만, 이 80년대 후반의 작품은, 현대 문학의 음울하기만 한 캐릭터보다는 한 차원 높은 페이소스를 끌어내는 수준 높은 '우울한' 캐릭터들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울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진행합니다만, 묘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매력 있는 작품입니다. 간간이 파격적인 성적 묘사가 등장하고 자살이 워낙 자주 나와서 좀 놀랍기는 합니다만, 매우 수준 높은, 좋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찾으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황하고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여과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분명한데 그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겠어서 그냥 살 수밖에 없는, 외롭고 우울한 인생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이 오늘날에도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 책의 주요 소재인 사람들의 외로움과 상실감, 그리고 인생에서의 방향 상실이 오늘날까지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입니다. 황석영이 그의 소설 '해질 무렵'의 마지막 문장에 썼듯이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며 우두커니 서 있는데' 이런 상황이 60년대나 현재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숲'이라는 원 제목보다 우리나라 '문학사상사' 번역본에 사용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책 전체를 잘 설명하는, 더 나은 제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상실한,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노르웨이의 숲'은 비틀즈의 곡인데요, 북유럽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좋은 노래입니다. 작품 속에서도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음악이기도 하고요. 노래를 듣다 보면 살짝 우울하고 가라앉는 느낌이 드는데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듣다 보면 어딘지 모르는 곳으로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날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 한 발치 물러서서 바라본 60년대 말의 일본을 그리다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86년 가을에서 '89년 가을까지 3년에 걸쳐, 그리스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에 쓴 소설이 그의 출세작인  '노르웨이의 숲''댄스 댄스 댄스'입니다. 특히 '노르웨이의 숲'은 그리스에서 쓰기 시작해서 시칠리아를 거쳐 로마에서 완성했고 '87년에 일본에서 출간했는데요, 유럽 여행기인 '먼 북소리'(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의 산문집이기도 합니다)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나에게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와 '댄스 댄스 댄스'는 결과적으로 써야 했기 때문에 썼던 소설들이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을 일본에서 썼다면 아마도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색채를 띠게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만큼 수직적으로 깊게 '파고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좋은 측면에서건 나쁜 측면에서건.


- '먼 북소리', 머리말 중에서


일본인인 하루키가 일본을 벗어나서, 보다 객관적으로 60년대 후반의 일본을 깊게 파고들어 소설을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쓸 수밖에 없었다는 운명과도 같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글을 썼습니다. 예를 들어 당대의 학생 운동이나 이에 기반한 대학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대해서는 작품 곳곳에서 상당히 냉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무언가 중요한 것을 상실한 시대에, 잃어버린 것을 찾는데 이념 학습이니 정치적인 학생 운동이니 하는 것들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일본에서 썼다면 이 정도의 밀도와 깊이로 나오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것인데요, 수긍이 갑니다. 일본인을 포함한 동양인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고 스스로를 '객관화'시키면서 썼다는 것이 수준 높은 작품을 쓸 수 있었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 정신병 요양을 위한 요양소와 바깥 사회 중, 어디가 '정상'일까요?


이 작품은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 깊은 장은 6장으로 나오코가 있는 요양소를 와타나베가 찾아갔을 때의 일을 그린 부분입니다. (분량도 제일 많은데요, 전체 486페이지 가운데 127페이지입니다) 와타나베는 월요일에 이 요양소를 방문해서 수요일까지 3일간 머물면서 나오코와 그녀의 룸 메이트인 레이코의 삶을 체험합니다.


요양소의 삶은 굉장히 규칙적이고 정돈되어 있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환자(?)들은 스스로 일상을 계획하고 서로 도우면서 무탈하게 살아갑니다. 각자의 장기를 살려 서로를 가르치기도 하면서요. 어찌 보면 이런 삶이 '정상인'들과 사회에서 부대끼며 사는 삶보다 더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화롭고 서로를 돕고 배려하면서 나름 재미있게 살아갑니다.


이 요양소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모범적이고 상호 존중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곳에 일반사회와 비교했을 때 없는 것은 무엇일까도 또한 생각해 보았고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경쟁'이 요양소에는 없더군요. 경쟁이 없으니 인센티브도 없고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밟고 앞으로 빨리 나갈 필요도 없고요. 역으로 생각하면 과도한 경쟁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들을 정신병자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쯤 되면 어떤 삶이 정상적인 삶인지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 하루키가 사랑한 작가와 책들


하루키는 이 작품에서 그가 사랑한 작가들과 그들의 책에 대한 애정과 오마주를 듬뿍 표현합니다. 존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 트루먼 카포티, 존 업다이크, 토마스 만(마의 산) 등 하루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과 유럽의 거장들에 대해 언급이 자주 됩니다. 이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씩 읽어 가는 것도 하루키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문장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글을 쓴다. 나는 무슨 일이건 문장으로 만들어 보지 않으면 사물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타입이니까.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뿐이다.


일상 생활면에서 보자면 우익이건 좌익이건 위선적이건 짐짓 악당인 척하건 별다른 차이가 없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은 가슴이 철렁할 만큼 깊고 맑았다.


나는 때때로 공중에 떠다니는 빛의 알갱이를 향해 손을 뻗어 보기도 했지만 손가락 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는 내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한 독서가였는데, 사후 삼십 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는 기본적으로 읽지 않았다. … "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냐.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는 데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인생은 짧으니까."


나는 혼자서 옥상으로 올라가 위스키를 마시며 생각했다. 나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냐고.


물론 대학을 바리케이드로 봉쇄한 그들 또한 진심으로 대학이 해체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학이라는 조직의 주도권 변경을 갈구했을 따름이고, 나에게는 그 주도권이 어디에 있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신사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요? 혹시 정의 내릴 수 있으면 가르쳐 주시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신사지."


"… 여기를 떠나는 건 완전히 개인의 자유지만, 일단 한 번 나가면 돌아올 수 없어. 다리를 불태우는 것하고 같아. 이삼일 바깥 생활을 하다가 여기로 돌아오는 건 안 된다는 거지. 그렇잖아? 그랬다가는 들락날락 엉망이 되어 버릴 거야."


"이런, 자기를 평범하다고 말하는 인간은 절대로 신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게 바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스콧 피츠제럴드가 아니었나?"


매혹적인 커피 향이 어두컴컴한 실내에 오후의 따스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 그렇지만 이 세상을 지탱하는 건 서민인 데다 착취당하는 것도 서민이잖아. 서민도 모르는 말로 무슨 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 이 대학 자식들 대부분이 엉터리야.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남한테 들키는 게 두려워서 벌벌 떨어."


시간조차 나의 발걸음에 맞춰 느릿느릿 흘렀다. 주위 사람들은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와 내 시간만이 수렁에 빠져 질퍽질퍽 제자리를 맴돌듯이 걸어갔다.


그 봄, 나는 꽤 많은 편지를 썼다. … 마치 편지 쓰기를 통해 산산이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생활을 겨우 붙들어 두는 사람처럼.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러나 거기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 나는 어느 곳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애타게 미도리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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