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영화네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는데.
* 용이 될 수 있었으나, 승천하지 못하고 이무기로 그치고 만 작품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명불허전, 감상하는 내내 즐거움을 줍니다만 그 이외의 요소, 특히 캐릭터를 구축하고 활용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미숙한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영화에서 캐릭터 구축과 활용, 밸런싱 및 그를 통한 이야기 전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출연한 배우들과 그들의 연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감상을 추천드립니다만, 그게 아니라면 보지 마세요!!!
# 캐릭터들의 아수라장, 이건 100% 감독의 책임입니다.
이 작품은 장점이건 단점이건 캐릭터로 평을 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캐릭터 구축을 잘해서 효율적으로 활용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미숙한 부분 또한 많아서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제목이 '아수라'입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캐릭터 활용이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캐릭터 간의 활용도 및 구축의 완성도 간의 편차가 너무 커서 전체적인 영화의 퀄리티가 많이 낮아졌습니다. 호랑이는 늑대를 잡을 때나 토끼를 잡을 때 모두 다 전력을 다한다고 하는데요, 김 감독께서는 일부 캐릭터에는 힘을 쏟아부으셨으나 일부 캐릭터는 만들다 마신 것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정육점에서 고기 칼을 잘 다루는 명인이, 그 고기 칼로 섬세하게 회를 뜨려고 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캐릭터들을 잘 구축해서 섬세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고자 했다면, 회칼을 세밀하게 다루기 위한 연습과 준비를 더 많이 했어야 합니다.
① 한도경(정우성) : 영화 속에서 내내 당황하고 방황하기만 한다.
영화를 보면서, 끝나는 순간까지 이 캐릭터를 어떻게 구축해서 활용할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졌습니다.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요짐보'의 미후네 토시로, '밀러스 크로싱'의 톰(가브리엘 번)과 같은, 양 진영을 모두 농락하는 영민하고 똑똑한 캐릭터로 구축이 될까. 아니면 힘으로 모두 다 밀어붙이는 과격한 형사로 구축을 하고 이야기를 끌고 가서 마무리할까. 그런데 모두 다 아니더군요. 한마디로 이도 저도 아닌 캐릭터, 굉장히 강하고 쎄 보이는 캐릭터이지만 나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굉장한 낭비입니다, 그가 주연임을 생각하면.
정우성은 연기를 꽤 잘하는 배우입니다. 아니, 최소한 이 작품 속에서처럼 이렇게 허둥대고 갈피 못 잡고 방황하기만 할 정도의 연기력을 가진 배우는 아닙니다. 이건 배우가 아무리 시나리오를 잘 소화하고 캐릭터를 나름 잘 구축한다고 해도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각본의 문제, 감독의 캐릭터 구축 역량이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이 정우성 활용법이었습니다. 안쓰러울 정도로 헤매고 방황하고 당황하고 갈피 못 잡습니다, 영화 속에서 내내. 주인공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니 전체적인 이야기가 우왕좌왕하고 갈피를 못 잡을 밖에요. 원래 감독이 생각한 제목이 '반성'이었다고 하던데, 감독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② 박정배(황정민) : 가장 흥미 있는 캐릭터. 명불허전. 자신의 물욕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팔 한쪽 잘리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인물. 이 작품에서 가장 구축이 잘 된 캐릭터.
물욕과 권력욕이 사람의 몸을 입으면 이 사람이 되겠구나 싶을 정도로 형상화 및 구축이 잘 된 캐릭터입니다. 그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 황정민이라는 점도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합니다. 잘 구축된 캐릭터와 연기력 좋은 배우의 만남, 영화에서 이 이상 바랄 게 있나요. 이 작품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정말 사람이 있을까 하고 그냥 영화려니 하고 봤겠지만 요즘은 이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을까 하는 씁쓸함을 느끼며 박성배라는 캐릭터를 감상했습니다. 악 중의 악, 절대악의 화신과 같은 인물. 그런데 그게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섬뜩했던 인물이었습니다.
③ 문선모(주지훈) : 구멍이 가장 많이, 숭숭 뚫린 캐릭터. 그러다 보니 질문이 가장 많이 생기는 캐릭터.
우선 주지훈이라는 배우의 연기가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연기도 좋고 다른 배우들과의 합도 좋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구멍이 가장 많은 캐릭터라서 좋은 연기가 상대적으로 빛을 바랐습니다. 한도경(정우성)과의 관계가 왜 그렇게 돈독한지, 그리고 박성배에게 왜 그렇게 몰입 및 충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불친절하고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이 캐릭터의 불완전 연소 및 활용도 감독 및 각본의 잘못입니다. 이 캐릭터도 감독님이 반성을 좀 하셔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캐릭터가 급변하는 것을 피하라고 충고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당황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지면서 질문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경 및 행동에 변화가 심한 캐릭터를 쓰려고 하면 사전 작업이 충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문선모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이러한 사전 작업이 없습니다. 왜 문선모가 박성배에게 그렇게 몰입/몰두/충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너무 없다 보니 영화 전체적으로 봐도 구성상에 문제가 좀 생깁니다. 단순히 양복과 외제차와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죠. 그것 때문에 그렇게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무언가 부족합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한도경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머뭇거리는 부분도 잘 설명이 안 됩니다. 말 그대로 구멍입니다.
④ 곽도원 : 명불허전. 깡패 같은 검사 연기를 그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있을까. 스테레오 타입 연기가 보기에 익숙하고 흔하다고 해서 쉬운 게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깡패인지 조폭인지 검사인지 구분 안 가는 캐릭터를 가장 잘 연기하는 배우가 아마도 곽도원이 아닐까 합니다. 어찌 보면 정형화된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연기를 원래 잘하는 배우이기도 하고 또 검사 연기 경험도 있으니 딱 맞는 옷을 입혀 놓은 듯,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연기합니다. 막판에 박정배와 장례식장에서의 불꽃 튀기는 대결은 이 영화에서 몇 안 되는 고품질의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막판에 살기 위해 비굴해지는 연기도 인상적입니다.
# 감독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일까 모르겠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네, 정말 김성수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다 죽어 나가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그 과정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를 도무지 감이 안 옵니다. '나쁜 놈들은 결국 다 벌 받고 죽는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너무 힘을 많이 썼습니다. 좋은 배우들 데려다가 이 정도밖에 활용을 못했다면 감독/각본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김 감독님, 제발, 부디 회칼은 거두시고 정육점 고기 칼을 앞으로 잘 써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