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를 대하는 방법
핸드폰의 ‘도와줘’ 앱에서 알림이 왔다.
아이가 집 근처에 올 때 알림 설정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핸드폰을 사주게 되면서 아이의 핸드폰에 도와줘 앱을 설치해두었는데 아이가 어느 위치에 머무르는지 이동시간과 우리 집 근처에 왔을 때 알림이 오게 되어있어 잘 사용하고 있는 앱이었다.
아이가 돌아오는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한 단어를 곱씹는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그리고 아이가 집에 왔을 때 환하게 웃으며 말해준다.~
남의 자식에게 말하듯이~ ‘어서 와~ 오늘 하루 어땠어?’
반갑게 웃으며 말하는 나와 달리 아이는 집에 오자마자 화가 나서 울먹이며 빠르게 말한다.
‘비행기 영상의 길이가 14시간인 걸 봤는데 14시간을 잠도 못 자고 촬영하면 손 아파? 안 아파? 14시간 동안 어떻게 촬영해야 해?’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이 말의 뜻을 아는 알고 있다.
예전에 유튜브 영상을 우연히 봤는데 영상의 길이가 총 14시간인 비행기 주행 영상을 보고 매우 당황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매우 속상해하고 있었다.
우리는 영상의 길이나 남은 시간이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아이는 오랜 시간을 촬영하는 상황이 매우 힘들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의 아이는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이해되지 않아 정말로 화내고 속상해한다.
나는 사실 그게 그렇게 슬픈 일인지 솔직히 전혀 공감되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반복되고 울고 난리를 치는 횟수가 많아지면 솔직히 나도 화라는 감정이 슬슬 올라온다.
하지만 아이의 독특함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탠트럼이 나거나 울음을 터트리거나 해도 감정적으로 크게 동요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의연하게 반응하는 편이다.
이 아이가 울고 짜증 내는 것이 나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자신이 힘들어서 나오는 반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되고 나니 아이의 감정과 내 감정을 분리하는 일이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아이가 울면 귀엽게 바라볼 수 있지만 내 아이가 떼를 쓰고 탠트럼을 일으키면 마치 내 감정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며 나와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아이가 나의 감정을 긁으려고 하는 순간에 내 마음을 다잡으며 ‘남의 자식이다’를 마음속에 외친다.
그럼 내 자식이 아니니 마음의 여유가 생기며 아이에게 화를 내기보다는 아이가 했으면 하는 방향성에 대해 말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면
‘또 이러네? 너는 안 하기로 했는데 또 그러니? 왜 그러는 거야? 엄마가 울면 안 된다고 했지?’라는 말이 먼저 나올 텐데 내 자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봐, 이렇게 하는 걸 원해?’라고 마음이 좀 더 여유로워진다.
늘 생각한다.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나에게 온 손님처럼 생각해본다.
손님이 우리 집에 왔다면 내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아니라 손님이 원하는 게 무엇일지 생각하게 된다.
손님이 무엇을 먹고 싶을지 손님이 무엇을 하고 싶을지를 먼저 물어보고 신경 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아이를 손님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나에게 잠시 머물다 갈 아이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유한하고 그렇다면 유한한 시간 동안을 즐겁고 행복하게 지낼 방법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자녀와의 시간이 유한한 것이 맞다.
아이가 사춘기만 되어도 부모와의 시간보다 친구와의 시간을 소중히 하게 되고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 독립적인 성인으로 살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은 부모란 다 해주는 부모가 아니라 혼자서도 잘 해낼 수 있도록 단단한 성인이 되어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 생각한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대할 때도 나는 아이들에게 화가 잘 나지 않는다.
주변의 선생님께서는 나의 그런 점을 관찰하고는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왜 화가 안 나요?’라고 묻기도 하고 ‘나는 그 아이가 밉던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내 반 아이, 내 아이로 생각하지 않고 그 아이를 손님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태도는 감정이 섞이지 않은 언어로 여러 번 관찰한 뒤 말해주고 스스로 행동을 변화할 수 있게 조언해준다. 엄마의 잔소리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조언이 아니라 잔소리로 생각하고 그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변화하려면 자신이 그 잘못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조금이라도 변화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달라질 수 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 수업을 피해 맨 뒷자리에 앉아서 몰래 핸드폰을 하는 학생이 있었다.
수업을 하다 보면 딴짓을 하는 게 신기하게 한눈에 다 들어온다.
그런데 오늘 내가 나가야 하는 진도의 양이 있다 보니 알면서도 그 한 명의 학생을 지적할 수 없어 모르는 척 지나가는 일도 있었다. 문제는 이 학생의 이런 태도가 나의 수업 시간에만 그런 건 아니라는 점이다.
몇 번의 관찰을 하고 그 학생을 따로 불렀다.
‘선생님이 몇 번 관찰해보니 3번 정도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핸드폰을 몰래 하더라. 선생님은 알고 있었는데 나가야 하는 진도의 양이 많아서 너를 지적하지는 않았어. 그런데 선생님이 지적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걸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너의 그런 태도가 선생님 시간에만 그렇지는 않을 거야. 다른 선생님들도 알고 있다는걸 알아야 해. 그럼 앞으로는 이런 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해 볼 수 있겠니? 고등학교에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는 건 과목 교사의 재량인데 그런 태도로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어. 인문계 고등학교에 왔으면 대학을 가려고 하는 마음이 있으니 너의 태도에 대한 평가는 스스로 신경을 써야 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 아이는 조금씩 행동을 수정하려고 노력했고 다른 과목 수업 시간에도 핸드폰 사용을 한다는 이야기는 나에게 전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보이면 나는 따로 불러 칭찬을 해준다.
‘요즘에는 수업 태도가 정말 좋아진 것 같아~ 공부를 조금씩 해보니 어때?’라며 좋아진 점에 대해서도 한 번 더 이야기해준다.
이런 칭찬은 아이를 더욱 변화하게 만든다.
내가 칭찬을 하는 이유는 아이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칭찬이기 때문이다.
잔소리가 아닌 조언은 아이를 변화할 힘이 있다.
엄마의 말은 잔소리고 교사의 말은 조언처럼 느껴지는 것은 감정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말랑한 젤리 같아서 작은 칭찬과 조언에도 변화하려고 노력한다. 어쩌면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관심과 애정과 격려가 아니었을까?
나는 자식에게 감정이 섞이게 되는 마음을 너무나도 잘 이해한다. 나도 그러기 때문이다.
모든 부모에게 이런 마음으로 아이를 대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아이와의 관계가 좋아질 것이다.
나도 아이에게 엄마이면서 잔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늘 반성한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내 자식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