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을 따라 걷기로 했다.

by 유기

어릴 적 온 가족이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바닷가에서 맞이했던 일출. 내게 태양은 늘 새로움의 상징이었다. 재수강을 위해 돌아온 텅 빈 캠퍼스에서 마주한 붉은 일몰은,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저물게 하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는 듯했다.


재수강을 하던 시절은 나의 인생의 궤도를 바꿔놓았다. '기초 생물학'을 다시 들으며, 처음으로 공부를 어떻게 하는 건지 깨달아갔다. 강의실 맨 앞줄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녹음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난 뒤 기숙사에서 강의를 다시 들으며 복습했고, 처음으로 구매한 중고 전공서적을 붙들고 씨름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게 정말 즐거웠다. 시험지를 받았을 때, 아는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첫 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이후로, 시험 문제를 마주하는 순간조차 설렘이 되었다. 굉장히 변태스럽지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펼쳐보는 교과서는 재밌는 이야기들로 가득했고, 교수님의 시험 문제는 공부한 내용과의 숨바꼭질 놀이 같았다. 그렇게 공부에 재미가 붙자 욕심이 생겼다.


유의미한 여름학기를 마친 나는, 드디어 2학년 가을학기 수업을 신청할 수 있게 되었다. 보통 네 과목만 듣는 학생들과 달리 나는 일곱 과목을 신청했다. 전공 5과목, 교양 2과목. 공부가 재밌고, 도전 정신이 투철해진 나는,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시험의 결과를 확인하는데 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신없이 학기를 시작한 지 2주쯤 됐을 때, 전공수업 하나를 뺐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기화학(Inorganic Chemistry)은 사람이 들을만한 수업이 아니었던 것 같다. 졸업 요건을 잘못 이해해서 덜컥 신청한 수업이었다. 졸업 조건에는 Inorganic Chemistry(무기화학) 수업을 하나 이수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학교 선배에게 물어보니 여기 나오는 Inorganic chemistry는 유기화학이 아닌 다른 화학 수업을 뜻하는 걸로, 1학년때 들었던 '기초 화학'이 충족하는 부분이었다. 당시엔 수강 취소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큰 고민하지 않고 바로 수강취소해 버렸다.


돌아보면 허무한 선택 같았지만, 그 안에 '놓을 줄 아는 법'이라는 배움이 있었다. 그 순간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예전의 나는 무작정 버티다 무너졌을 테지만, 이제는 나를 조율할 줄 알게 되었으니까.




책상 앞에서만 쌓이던 날들이 어느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되었다. 학업의 균형을 찾고 싶던 나는, 봄학기를 시작하면서 당시 다니던 캠퍼스 교회에서 성경공부 리더로 섬기기로 했다. 캠퍼스 빈 강의실에서 하루는 목사님과 성경 공부를, 또 다른 하루는 내가 맡은 청년부 그룹의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시간이 많이 쓰이는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정 반대였다. 교회에서 리더는 많은 정성이 필요한 직책이었다. 내 삶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갖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나와 비슷하게 대학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하는 친구들을 따로 만나서 같이 밥도 먹고, 운동도 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렇게 '나'를 다그치던 시간표 안으로 '우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하고, 작은 안부를 묻는 사이. 내가 붙잡고 살던 빈자리의 모서리가 둥글어졌다.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공부도 더 또렷해졌다. 마음이 따뜻해지면, 문장도 공식을 만나듯 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학기를 보내며 나의 하루의 결이 달라졌다.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 먹기 전까지 도서관이나 기숙사에서 복습을 했고,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저녁을 먹고는 잠들기 전까지 과제와 시험공부를 했다. 그래도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점심까지는 과감히 비워 두었다. 불금을 공부하는 데 쓰는 것만큼 아쉬운 게 일이 없지 않을까. 사람을 만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나름 힐링도 하면서 한주 한 주를 보냈다.




대학교 2학년은 나에게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학업의 한계에 도전하며 대외활동, 그리고 휴식의 균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단순한 학기가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다져준 전환점이었다. 더 멀리, 더 바쁘게 달려가야 할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균형을 배운 이 경험이 내 발걸음을 지탱해 줄 거라 믿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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