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학생 비자로 연명하는 유학생의 신분으로 미국에서 의대를 가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딸 가능성보다 낮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침 한국에서 의전원이 없어지면서 '의대 학사편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나도 당당하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학부 시절 방황도 있었지만 결국 우등(Cum Laude)으로 조기 졸업했고, 독특한 동물 행동학 연구와 다양한 교외활동, 미국 최고의 병원에서 인턴쉽과 직장생활까지 경험했다. 스스로 보기엔 충분히 경쟁력 있는 이력이라 믿었기에, 합격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류를 챙겨 원서를 내고, 학교를 둘러보며 서울의 공기도 함께 맛보았다. 고속터미널에서 내려 본 가톨릭 의과대학 병원은 드라마 속 장면처럼 낯설고도 새로웠고, 회기역 근처 파전 골목에서는 미국에서 느낄 수 없던 정겨움이 묻어났다. 작은 설렘과 함께, 좋은 결과가 있기를 마음 깊이 바랐다.
하지만 웬걸, 아빠와 함께 망리단길을 걷던 중,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불합격"
짧은 단어가 전부였다. 나에겐 면접할 기회조차 없었다. 퇴사 후 최선을 다해서 준비했는데, 결과는 의외로 단호했다. 고등학교 시절 운동선수로 지낼 때도, 대학에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첫 직장을 얻었을 때도, 나는 늘 노력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맞닥뜨린 부정은 낯설고 쓰라렸다.
화가 치밀었고, 억울했다. 내가 흘린 땀과 시간은 어디로 간 걸까. 잠깐은 모든 게 무너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자, 난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핸드폰만 붙잡고, 이유 없는 낮잠으로 하루를 흘려보냈다. "괜찮다"는 자기 위로를 하면서도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실패와 마주할 용기가 없다는 걸.
고등학교 때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갔다면. 내 부족함을 인정하기 싫어 끝없는 '만약'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과거 대학교 1학년 시절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부적응을 피해 어두운 기숙사 침대 속으로 숨어 있던 때. 그때도 나는 핑계와 합리화 뒤에 숨어 있었다. 그 기억이 떠오르자, 이번에도 똑같은 선택을 반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숨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래서 아주 작은 행동부터 다시 시작했다. 책상 위에 쌓아둔 원서 자료를 정리하고, 실패의 흔적을 기록했다.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회피할 것인가. 선택은 내 몫이었다.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으니 조금씩 마음이 가벼워졌다. 실패는 여전히 아프지만, 이제 그 아픔이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노을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던 그때처럼, 이번엔 실패를 들고 또 한 걸음 내디뎠다. 실패는 나를 조각냈지만, 그 작은 조각들이 발밑에 모여 단단한 반석이 되었다. 실패를 경험했다는 것, 그리고 다시 뛸 준비를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돌아보면, 내가 진짜 배운 것들은 교과서 속에 있지 않았다. 책상 위의 시험지와 교과서가 알려주지 못한 것들을, 성공과 실패가 가르쳐주었다. 교실에서 배운 지식은 성취를, 실패의 아픔은 나를 단단하게 만드는 힘을 전해주었다.
삶은 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속에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경험이야말로 가장 값진 배움이었다. 교과서 밖에서 만난 세상은, 실패조차도 공부의 한 장이라는 것을 나에게 일깨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