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는 초 가을,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2-3달 정도 되었을 때였다. 학교가 끝나면 학교 앞에 수많은 노란 스쿨버스가 대기하고 있는데, 내가 타야 할 버스를 잘 찾아서 타야 했었다. 각 버스 앞 유리에 일정한 코드가 A4용지에 적혀있고 난 집으로 가는 코드가 적혀있는 버스를 찾아 타면 되는 거였다.
그날,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했던 나는 허겁지겁 맨 앞부터 주차된 버스의 앞 유리를 훑으며 내 버스를 찾아 올라탔다. 하지만 기다려도 버스는 출발하지 않았고, 몇 분 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뭐라 열심히 설명했다.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나는, 내 주변 몇몇 학생들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따라 내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서성이며 모르는 학생의 우산을 빌려 쓰고 있는 동안, 버스는 몇 안 되는 학생을 태운 후 출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같이 내렸던 학생들의 부모님이 하나하나 학교에 도착해 아이들을 태우고 갔다. 뒤늦게 주변이 점점 조용해지고, 우산을 빌려 씌어주던 학생마저 떠나자,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엄마한태 연락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
전화를 하기 위해 학교로 뛰어갔지만 학교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당황한 나는 학교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문이란 문은 모두 다 두드려 봤지만, 어느 문도 열리지 않았다. 몇 시 인지도 모르는 상황에 머리와 마음이 복잡해졌다. 잠시 심호흡을 하고, 머릿속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떠올렸다. 내가 아는 유일한 길, 스쿨버스가 다니는 길. 다시 말하면 걸어가기에는 정말 비효율적인 길이었다. 하지만 내가 유일하게 아는 길이니 어쩔 수 없이 나는 비를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걸을수록 몸이 젖고, 손발은 차가워졌지만, 마음속에는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학교를 나와서 오른쪽으로 쭈욱... 누나가 다니는 으리으리한 고등학교를 지나면, 곧 시립도서관이 나올 거야. 거기서 오른쪽으로 돌아 큰길로 한참을 걷다 보면 늘 스쿨버스에서 내리는 곳이 있지. 거기서 맞은편에 있는 소방서를 끼고 크게 왼쪽으로 돌아서 또 한참을 걷다 보면 유대인들이 주말마다 보이는 회당 건물이 있고, 거길 지나치자마자 옆에 있는 나무가 우거진 지름길로 들어가면... 드디어 집이다!!
그렇게 2시간을 걸었을까 (사실 모른다,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하지만 웬걸, 집 문은 잠겨있고 결국 비를 피하지 못하고 집 문 앞에 비를 맞으며 엄마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 어떻게든 비를 피하려고 노력했다. 한국과 달리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 형태의 하우스였다. 집 앞에는 처마가 거의 없어 나는 문에 최대한 밀착해 가방을 방패처럼 얼굴 앞으로 올렸다. 젖은 가방 끈이 내 팔에 달라붙고, 손은 서늘하게 굳어갔다. 가방에서 전자사전을 꺼내 괜스레 새로운 영단어를 훑어보았지만 뜻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지나가는 전철 소리와 빗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시간이 된 듯, 천천히 반복되었다. 나는 그 소리들에만 집중하며 멈춘 것 같던 시간을 흘려보냈다.
한참 후, 차 소리가 들리더니 엄마랑 누나가 도착했다. 거의 울먹이던 엄마는 나를 붙잡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 엄마 얼굴에는 화와 안도,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누나는 입술을 꽉 다물고 "대체 어디 있었냐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치며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당시 엄마는 우산을 챙기지 미리 스쿨버스 스탑에 나와서 누나와 내가 오길 기다리고 계셨다. 누나를 태운 스쿨버스는 먼저 도착해, 누나는 엄마와 같이 차 안에서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엄마는 차를 타고 학교로 가는 길을 천천히 운전하며 나를 찾으러 갔다. 반대로, 누나는 우산 쓰고 나를 찾아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내가 아침에 함께 스쿨버스 픽업 존 까지 가는 직접 걸으며 나를 찾아봤다고 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나무가 우거진 지름길로 집에 가고 있었기에, 누나와 엄마는 나를 마주치지 못했다. 결국 나를 찾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고, 집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렇게 나는 핸드폰을 얻었다. 하지만 그 작은 기계가 생긴 건 단순히 사치품을 갖게 된 게 아니라, 다시는 오늘 같은 두려움과 무력감을 격지 않도록 하려는 가족의 안도와 걱정이 담긴 결정이었다.
최신형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어야 인싸가 되는 요즘 세상에, 매년 새로 나온 아이폰을 사달라며 징징대는 어린 사촌동생들 볼 때마다 딱밤이 마렵다.
'요즘 애들은 뭐든지 손쉽게 얻으려고 한다니까.'
내가 어릴 적 핸드폰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몸으로 배운 '안전의 증표' 덕이라고. 비록 그땐 2G 폴더폰이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