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전의 시간
오늘은 3년 동안 별 탈 없이 다니던 병원을 퇴직하는 날이다.
일은 손에 익을 데로 익어서 이제 눈감고도 할 만큼 모든 것이 편안해진 시점에 나의 퇴직 소식을 접한다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아마 “그만두면 뭐하려고?” 일 것이다.
월급이란 마약과 같아서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는 고정수입 때문에 과감하게 사직서를 던져버리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의 직장인들이고 나도 다르지 않았다.
두 아이의 학원비에, 오르는 장바구니 물가, 심장 쫄깃하게 계속 올라가는 대출이자까지..
과소비를 안 하더라도 예전보다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 뻔하고 재취업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난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하랴 살림하랴 힘들었다고는 하지만 좀 더 오래 버텨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남편은 고생했다고 그동안의 수고로움을 조금은 과장된 말로 위로해주었다.
“그 사람들이 자기 생각 많~이 할 거다. 어디서 이렇게 일 잘하는 사람을 만나겠어?”
주부의 경력단절이라는 벽을 깨고 3년 전 처음 직장일을 시작할 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진 걸 느낀다.
아들은 워낙 독립적이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므로 엄마의 빈자리를 그다지 아쉬워하지 않았지만, 그 보다 어렸던 딸아이가 처음에는 일하지 말라고 눈물까지 보여서 마음이 아팠던 만큼 한동안의 적응기간도 필요했다.
초등생이던 딸이 어느덧 중학교 2학년이 되어 이제 엄마보다 친구들과의 시간에 열중하게 되었고, 여러 모로 내가 일에 집중해도 좋을 환경이 되었지만, 엉뚱하게도 이런 외부환경과 반대로 나는 번아웃 상태가 된 것이다.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병원은 왜 그만두는 거야?”
“음…. 엄마 시간이 너무 없어서~”
대답은 해줬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할는지.
그리고 그 “시간” 이란 게 엄마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건지 느낄 수 있을까?
가족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던 “엄마”라는 사람도 한 템포 쉬어가는 구간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동안 감사했어요!
6시 30분 퇴근시간, 아니 3년 업무를 마무리하는 퇴직 시간이 다가오고,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들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근무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걸 감안하더라도 내가 이곳에 별로 애정이 없었던 건 분명하다!
원래 마음도 여리고 사람들과 헤어지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는 날이면 눈이 퉁퉁 붓도록 우는 것이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이번엔 웬일인지 눈물은커녕 담담하기까지 했다.
너무 힘들었던 일이 지겨웠기에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랄까?
이런 속마음과는 반대로 서운해하며 울먹이는 동료를 보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서둘러 헤어지고 버스에 올랐을 때 띠링~카톡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모바일 쿠폰과 함께 동료가 보낸 메시지에는 내 덕분에 그동안 편하게 일했다며 아까는 말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이 담겨있었다.
평소에 말이 없고 감정표현에 인색한 사람이라도 이별할 때는 하고픈 말을 하게 되나 보다.
좀 더 일찍 자기 마음을 표현했더라면 우리의 직장생활이 훨씬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어디쯤인지 그냥 궁금해서 해봤다는 딸아이의 능청스러운 전화를 받고 본능적인 촉이 발동했다.
이벤트 준비했구나?
집에 들어서자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없었는데 우리 귀요미들이 한 일을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드라이아이스와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베스킨라빈스 축하초와 포장 리본, 베란다에 숨겨놓은 스티로폼 케이크 박스까지…. 쯧쯔- 너희 앞으로는 좀 더 치밀해져야 되겠다.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앞에 놓고 퇴직 파티가 시작되고, 기껏 3년 일하고 그만둔 것이 이렇게 까지 호들갑 떨 일이냐며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피곤에 찌들었을 저녁시간을 편안한 기분으로 보내게 해 준 가족들에게 감사의 마음이 든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응원을 받으며 난 충전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