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 1
나의 주방엔 없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이름도 생소한 토마토 필러와 레몬 스퀴저까지 구비해놨었으니까...
그런데 난 이 물건들을 구입한 후 딱 한 번 쓴 것을 끝으로 10년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토마토와 레몬을 요리에 자주 활용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토마토 껍질은 끓는 물에 데쳐 벗기면 수월했고, 레몬즙은 마트에서 사다 먹는 게 더 깔끔했기 때문에 굳이 저 도구들을 꺼내고 손질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단 토마토 필러와 레몬 스퀴저뿐만 아니라 요리별 상황에 맞게 준비한 냄비와 그릇들,외쿡 요리프로에서나 볼법한 감각적인 주방 소도구들까지... 금방이라도 “참~쉽쥬?”하며 누군가 튀어나올 것 같은 주방이었다. 왜 그렇게 주방용품에 욕심이 많았던 걸까?
요리가 “업”인 사람들은 이 모든 걸 갖추고 있을 만하다. 특히, 요리를 정말 사랑하고 24시간 그 일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라면 주방도구에도 남다른 애정이 드러나서 그 가짓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항상 새로운 요리를 선보여야 하는 직업의 특성상 그들은 “필요하니까” 산다.
그런데 난 어떤가?
기껏 한다는 요리는 가족들과 연명하기 위한 아주 익숙한 반찬일 뿐이고, 어쩌다 특별식이다~라고 내놓는 음식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찜이나 전골 정도이다.
창의력은 약으로 쓸래도 없는 왕고지식 쟁이라서 새로운 레시피는 찾아볼 생각도 못 한다.
“오늘 냄비밥이야?”
“응~ 이게 가마솥에 한 것처럼 맛있대”
난 자랑스럽게 무쇠냄비를 닦으며 설명했다.
뭐, 결과물이야 나쁘지 않았다. 얇은 스테인리스 냄비에 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맛있을 테지.
한껏 욕심을 내서 해낸 밥이었지만 식구들은 그냥 무덤덤했다.
맛 평가단도 아니고 매일 먹는 쌀밥을 누가 그렇게 세심하게 음미해 보겠나?
나 역시 살짝 태워 눌은밥 처리하느라 귀찮기도 했다. 결론은 우리 집 요리엔 갖가지 냄비가 모두 필요하진 않았고 최고급 도구라고 해서 음식 맛을 크게 좌우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도 이 무쇠냄비는 아직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비다.
뭉근하게 끓여내는 삼계탕이나 찜 요리는 정말 기막히게 잘 해내는 녀석이기 때문이다.
필요한 줄 알았던 주방도구와 정말 필요한 것들 사이의 갭이 너무 컸다는 걸 자각한 후로 물건에 대한
나의 지론도 바뀌었다.
한번 마음에 들면 좀처럼 싫증을 낼 줄 모르는 나에게, 같은 냄비를 평생 쓴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같은 냄비로라도 가끔은 새로운 레시피의 요리를 선보여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걸 느꼈다.
언제나 특별할 게 없었던 밥상을 마주했던 가족들에게 느꼈던 미안한 마음과 함께...
365일 매번 색다른 요리를 해내지도 않는 내가 수많은 주방도구들로 빽빽하여 정신없는 <Hell’s kitchen>을 만들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