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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국내 여행 중에 벌어진 일

여행 중의 성희롱

by 민짱이

오랜만에 주말 휴무를 얻어 1박 2일로 국내 소도시 여행을 계획했다. 첫 날은 서천에 있는 국립생태원, 둘째 날은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지를 보기로. 국립생태원의서의 경험은 너무 특별했다. 사람은 많았지만 그 이상으로 동식물을 맘껏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 저녁에 익산으로 넘어와 맛있는 맥주와 과자 한 봉지를 해치우고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도 보고 다음날을 고대하며 잠에 들었다.


익산은 생각보다 규모가 큰데 버스 배차도 굉장히 길어서 뚜벅이 여행자가 다니기엔 부적합한 곳이었다. 다만, 시티투어 버스가 체계적으로 잘 되어있기에 그걸 이용하려고했고 마지막 목적지까지 너무나 만족스럽게 관람하고 나서 종장에 일이 터졌다.


탑승자는 나 한 명이었고, 내가 타자마자 버스 기사는 '같이 얘기 좀 하면서 가게 앞에 앉아요.'라고 했다. 얼떨결에 '아, 네.'하며 앞자리에 앉았던 내 자신이 참 한탄스럽다. 출발시간이 됐는데 버스를 출발하지도 않고 버스문을 연채로 담배를 태우는 기사. 그때부터 쎄한 느낌이 있었지만 여행의 피곤함으로 그 느낌을 무시했고, 모든 문제의 시작은 느낌의 방관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와이프가 첫사랑이며 언제 결혼했고 등등 정말 평범한 말들로 시작됐던 대화였는데, 갑자기 자신이 캐나다 여자를 잠깐 만났다고 했다.

-와이프가 첫사랑이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니, 참... 다 그런것이여. 와이프도 바람 좀 폈을 거여~


자신이 바람 필 걸 정당화하며, 또 당당하게 얘기하는 모습. 그래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나이 먹고 어린 여자한테 들킨게 부끄러워서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다 치자.

갑자기 그 캐나다 여자와의 만남을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캐나다는 미혼률이 높다며, 또 자유섹스를 즐긴다며. 계속 섹스, 섹스거렸다.

-바람 핀 걸 왜 부끄러움도 없이 얘기하세요?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죠.

참다참다 한 마디 내뱉었다.

그런데 내 말은 무시한 채 계속 지 할말만 하며 운전 중에 계속 뒤돌아보느라 차는 휘청휘청.

가는 30분이 정말 고역이었다.

또 무서웠다.

괜히 잘못 말 꺼냈다가 차밖에 지나다니지 않는 도로에서 해코지라도 당할까봐.


결국 너는 지껄여라, 나는 안들을란다라는 마음으로 창밖만 바라봤다.

그러면 또 잠깐 주제를 넘어간다. 음식이나 관광지 이야기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면 또다시 인간의 본능 이야기, 며느리한테도 바람피라고 권유했던 이야기.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종착지인 익산역에 도착했고, 갑자기 그 기사는 손이나 한 번 잡자고 했다.

그 한 마디가 뭐라고 수치스럽고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악수를 하듯 손을 내밀고 있는 기사.

항상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고 웃으며 받아주는 성격인지라 또 싫은 소리 못하고 그냥 손을 한 번 쳐줬다. 그리고 내리는데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들기는 그 손.


기분 나쁘니 하지말라고 명확하게 말을 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사회생활도 나름 해보고 산전수전 겪어봤다고 자부했는데 왜 병신같이 얼어붙어 있었을까.


결국 나 자신을 탓하게 된다.

더 강하게 거부하지 못한 자신.

하지 말라며 정색하지 못한 자신.

상대방의 기분을 살피고 맞춰주는 데 익숙해서 내 기분은 살필 여력이 없는 나 자신.


이렇게 또 나를 몰아세우며 스스로를 질책하고 있었다. 누가봐도 잘못한 건 그 기사인데도 왜 스스로를 다독여주지 못할망정 다부지지 못했던 내 모습만 복기하고 있는 걸까.


기분 좋은 여행의 마지막이 엉망이 됐고, 도저히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힐링하러 간 여행이었는데 되려 최악으로 치달았다.

전국 방방곡곡 혼자 여행을 많이 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고 그래서 더 충격이었나보다.


그러다 오랜만에 독서모임에서 친하게 지내는 분을 만났는데 내 얘기를 곰곰이 듣더니,

"지금껏 운이 좋아서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긴 역사 안에서 항상 가해자와 피해자는 존재해왔으니까요.'

그 문장이 뭐라고 내 머리를 강하게 내리쳤을까.


어쩌면 '왜 나에게만 이런일이 일어난거지?'라며 특수성을 부여하며 괴로워했던 게 아닐까.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며 그동안 불편한 상황을 만나지 않았던 건 내 태도에 따른 게 아니라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그래서 그냥 핫초코 한 잔을 타마시며 힘들었던 내 정신을 조용히 다독여주기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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