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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사람을, 감정을 깊이 바라보기

#파주여행 2편-'명필름 아트센터' 방문하다

by 민짱이



스크리닝룸에서 상영하는 무료 영화 두 편: 『작은아씨들』, 『34번가의 기적』



명필름 아트센터는 파주출판단지에 위치해 있고 주말과 공휴일에만 운영이 된다. 길찾기 앱에서 집에서 명필름아트센터까지 도보로 35분. 걷기를 애정하는 내게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고, 추운 파주 날씨를 알기에 옷을 여러 겹 껴입고 출발했다.

아울렛까지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차들로 나까지 매캐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울렛의 뒤편부터는 다른 세상에 온 듯 새소리 하나 없이 한적했다. 건물만 덩그러니 놓여진 잿빛 도시처럼.

그러나 명필름아트센터에 도착하자마자 유리창 너머로 북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1층 카페로 들어서자 온 세상 소란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나보다 싶었다. 한쪽에는 카페에서 기르는 강아지가 얌전히 앉아있고, 그 강아지를 구경하는 사람들, 굿즈를 구경하는 사람들, 커피를 주문하려는 사람들과 받으려는 사람들. 영화 시작 전까지 얌전히 앉아 커피 한 잔 홀짝이려는 생각은 바로 중단한 채 2층으로 향했다.





2층에 오니 '영화음악감상실'이라는 종이가 보인다. 12월 29일까지만 운영된다고 한다. 어라, 이런 건 무조건 봐줘야지. 입장권을 구매하기 위해 다시 1층 카페로 향했다. 결제를 하고나서 동그란 스티커를 주며 옷 위에 붙이라고 했다.




'영화 음악' 감상이라는 게 다소 생소했지만 이런 컨셉은 또 처음인지라 두근두근했다. 입장문 앞에 상주하는 직원은 없었지만 어쨌든 5천원이라는 정당한 가격을 지불했으니 일단 들어섰다. 운이 좋게도 감상실에는 나밖에 없었고, 곧 정각이 되면 영상이 나올터였다.

곧이어 영화 영상과 함께 하단에 자막처럼 ost에 대한 설명이 나왔다. 한쪽 눈은 빠르게 지나가는 글자를 보고 다른 한쪽으로는 영상을 보느라 진땀이 났다. 차라리 미리 설명이 나왔으면 좋지 않았을까. 눈으로는 영화의 장면들을 담고 귀로는 영화의 음악을 담을 수 있게.

결국 ost에 대한 설명은 포기한 채, 장면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노래도 영화를 통해 접하니 색다른 기분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들었던 기현의 "세월이 가면"과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나오는 "세월이 가면"은 의미하는 바가 다르게 느껴졌다. 전자가 우리 모두의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애틋함,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면 후자는 좀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기는 편지같았달까.

돌이켜보면 특정 노래를 들을때마다 영화, 책, 장소, 사람 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음악은 때로는 행복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웠던 추억을 회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잠시 쉴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있다. 영화관이라기보다 복합 문화 공간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미리 예매했던 영화 상영이 곧 시작된다. 볼 영화는 바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 세계적인 작가 클레이 키건의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다. 내용도 모르는 채로 보게 된 영화는 답답하고 먹먹한데 주인공 빌 펄롱의 따뜻함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은 영화였다. 영화를 본 날 처럼 매서운 바람이 부는 한겨울에, 그 바람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들 틈에서 버티던 한 여자아이에게 내밀어졌던 거칠고 투박한 손.

비단 한 아이가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수많은 아이들을 이해하는 손.


좋아하는 좀비 영화 중 하나인 "28일 후"에서 처음 보게 된 배우 '킬리언 머피'.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그 연기력이 정점에 다했다고 본다. 언어가 아니라 비언어로 연기하는 배우. 눈빛 하나하나 빌 펄롱 그 자체였고, 그 안에 고민, 후회, 자책, 슬픔이 모두 담겨있으니 관객을 영화가 아니라 현실로 끌어당겼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하지 않은.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너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평을 많이 했다.

책 속 주인공에 이입해 폭풍 눈물을 흘리고, 영화를 보면 인물들에 깊이 빠져 일주일 간 여운이 가시지 않는 내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친구가 느끼는 감정 보다도 그 감정이 생기게 된 '맥락'이 더 중요했고, 맥락이 이해되지 않으면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수용하기가 어려운 건 사실이었다.

손쉽게 말하면 요즘 말하는 MBTI의 T형인간이라고나 할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작은 세상에서 갇혀있던 내가 정말 슬프고 기쁘고 화나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여러 형태의 감정을 배울 수 있었다. 여전히 감정이 발생하는 전후과정은 중요하지만, 감정의 여러 모양을 그릴 수 있게되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


사람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의 세상이 더 넓어졌으며 주변 사람들과 더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맥락만 생각하며 좁은 세상에 살았을 때는 당연히 타인을 이해하는 폭이 매우 좁았다. 타인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 따라서 우리의 세상을 넓히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이해해야하며 그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와 영화감상이다. 책과 영화에는 사람의 여러 감정이 무수히 쏟아지기 때문이다.


책과 영화는 허구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스토리는 현실이나 상상의 세계를 토대로 하지만 인물들의 감정이라는 동질성이 있다. 우리도 충분히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감정들로 구성되기에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내가 몰랐던 사건들을, 사람들을, 감정들을.


'파주출판단지'라는 특수한 산업단지 안에 '명필름아트센터'가 있다는 게 왠지 우연은 아닌 듯하다. 책과 영화.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과 감정을 키워주는 것. 명필름아트센터는 단순한 영화관이 아니라 단단하고 따뜻한 내면을 만들어주는 곳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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