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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행성RDY Jun 26. 2024

#18 그해 여름 그래도 좋았다

선풍기 대신 카세트 라디오...

그해 여름 그래도 좋았다   

  


아침부터 에어컨 혼자 열일 중이다. 몇 년 전, 어느 유튜버가 인류 최대의 발명품 중 하나가 에어컨인 것 같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었겠지만 여름만 되면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열기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도시에서 에어컨 없는 여름은 생각할 수도 없지만, 선풍기도 없이 보냈던 어느 해 여름 생각을 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직장을 다니며 친구랑 같이 자취를 했던 때가, 스웨덴 4인조 그룹 ‘Ace of Base’의 ‘Happy Nation’이 한창 인기를 끌던 해였던 것 같다. 일요일이면 친구랑 카세트 라디오에 ‘에이스 오브 에이스’ 테이프를 틀어놓고 청소를 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가 애용하던 카세트 라디오는 짙은 빨간색에 모서리는 둥글게 마무리가 되어있다. 라디오 수신용 접이식 안테나가 본체 위쪽 뒤편으로 얌전히 접혀있다가, 라디오를 틀 때면 제 실력을 발휘해 선명한 방송을 들을 수 있게 해 주며, 그해 여름을 함께했던 그 아이는 어떻게 우리에게 오게 되었을까?    

  

친구랑 같이 자취를 하던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지금 더위에 비하면 엄살이라 하겠지만 그 당시 몇십 년 만의 더위라며 시끌시끌하기도 했다.     


자취하고 처음 맞는 여름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어린 맘에 그런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야 에어컨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이 갖춰진 집에서 자취하는 좋은 세상이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으려나.    

  

어쨌든 날은 점점 더워지고 집 안의 더운 공기는 빠져나갈 생각도 하지 않는다. 베란다 창문을 다 열어두어도 땀이 줄줄 날 정도로 자다가 몇 번은 깨야 아침이 오곤 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한 친구와 퇴근 후 선풍기를 사러 간다. 잠시 후, 드디어 전자 제품 가게에서 나오는 우리 손에는 선풍기 대신 빨간색 카세트 라디오가 들려있었다. 미친 짓인 건 알지만 갑자기 마음이 요동을 친 것이다. 여름은 곧 지나갈 거니까 선풍기 대신 카세트 라디오를 사는 게 더 좋겠다는.

     

지금 생각해도 왜 갑자기 카세트 라디오에 꽂혔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라디오 방송이며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즐겼지만, 그 더위를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던 건지, 참!     


말할 필요도 없이 그해 여름은 잔인했다. 자청해서 그 잔인함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지만, 무엇이든지 기세가 꺾이는 시점이 오는 법이다. 몇 날 며칠을 자다가도 일어나 샤워를 하고 잠을 또 청하면서 보내던 여름도 서서히 꺾여가고 우리는 그해 여름에 잘 살아남았다.      


지금 같으면 단 하루도 못 살겠다고 할 것 같은데 그 상황이 재미있어 나름 즐겼던 그때 우리는 어렸지만 용감했었다. 무모할 줄 알았던 20대라 가능했었던 걸까?      


20대!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20대는 용감했었고 하나에 미치면 죽을 줄 알면서도 불에 거침없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오직 그것만 보기도 했다. 그래서 가장 많이 울고 깨졌던 시기였다.     

 

아련한 20대의 파편들이 하나씩 순서도 없이 지나가지만, 굳이 퍼즐 맞추듯이 끼워 맞추지는 말자. 단지 그랬다는 거지 새삼 추억을 나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난 지금에 더 집중하고 지금의 순간에 내가 온몸으로 머물고 즐기길 바란다. 오늘처럼 어쩌다 생각나는 지난 시간은, 뽀송뽀송 말린 하얀 반 팔 면티를 반듯하게 접어 잘 넣어두듯이 그렇게 뽀얀 면티처럼 잘 접어서 고이 넣어두고 싶다, 제자리에. 그리고 다시 지금을 산다.     

 

그래도 20대! 땡큐!! 그때의 너는 참 무모했고, 용감했지만 꼭 안아주고 싶다. 수고 많았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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