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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May 09. 2022

3. 새로운 것을 얻으면 반드시 다른 건 버려야 할까?

 연애와 결혼을 합쳐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우리지만, 여전히 각종 사소한 문제들로 말다툼을 벌이곤 한다. 어젯밤의 다툼은 결혼을 하며 새롭게 생긴 문제인데, 우린 그 중간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J는 공기업에서 근무한다. 그 말은 짧으면 2년, 길면 3년마다 전국에 있는 지사로 옮겨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결혼 전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는 J를 너무 사랑했고, 더 이상 데이트 후 헤어지는 일상을 지속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J와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심지어 다양한 지역에서 살아볼 수 있으니 재미있겠다는 철없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한 떠돌이 생활은 다양한 스트레스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얘기들은 뒤에서 많이 할 테니 잠시 접어두자. 결혼 후 첫 발령지였던 B 지역은 내가 평생을 살아온 A지역과 KTX로 1시간 거리였다. 결혼하며 직장도 그만두고, B지역에는 아무런 연고가 없던 나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게 되었다. 툭하면 눈물을 흘려대는 나를 보며 J는 함께 고통받았다. 그때 내 유일한 탈출구는 2주마다 2박 3일 일정으로 가는 친정 나들이였다. 지도 앱을 켜지 않아도 원하는 곳에 편하게 갈 수 있고, 버스앱 없이도 어디서 어떤 버스를 타면 되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내 고향 동네. 친구와 가족과 고양이가 있는 그곳에서는 우울한 마음을 접어둘 수 있었다. B지역은 1시간 거리에 기차 비용도 저렴해 한 달에 두 번씩 왕복을 해도 전혀 부담이 없었다. 한번 갈 때도 2박 3일 정도만 있다 보니 J도 내가 없는 외로움을 느끼기보다는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으로 사용했고, 무엇보다 친정에 다녀오면 내가 덜 우울해하는 걸 알아서 기꺼이 배웅해주곤 했다.

내가 사랑하는 고향 집 앞 공원

 문제는 그로부터 2년 뒤, 이번엔 본사가 있는 C 지역으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C 지역은 고향까지 차로 편도 4시간이 걸리는 엄청난 거리였다. B 지역에 살 때처럼 한 달에 두 번씩 가는 건 시간이나 비용적으로 부담이 커져 나는 한 달에 한번 친정에 방문하는 것으로 루틴을 변경했다. 한 달에 한번 가는 대신 한번 갔을 때 최소 4박 5일 정도는 머물렀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못 보던 친구들을 만나고, 동생과 맛집 탐방을 떠나고, 엄마와 쇼핑을 하고 아빠와 야식을 먹었다. 보고 싶던 고양이들은 원 없이 껴안고 뽀뽀했다. C 지역에 이사 온 후 8개월간 나는 이 기묘한 공존에 완벽히 적응했고, 꽤나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한 달 중 25일은 남편과 열심히 놀았고, 나머지 5일은 익숙하고 편한 친정에서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균형이 완벽하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그러나 J는 그렇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C 지역으로 이사 온 후 무려 8개월이 지난 후였다. 여느 때처럼 나는 J의 업무가 바빠지는 월말에 맞춰 A 지역으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고, 언제 갔다 언제 돌아올지 저녁 산책길에 J에게 물어보았다. J는 여느 때처럼 **일에 가면 좋겠다는 답변을 해주었고, 나는 집에 돌아와 J가 씻는 사이 비행기와 고속버스 중 무엇을 타고 갈지 고심 중이었다. 씻고 나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를 보던 J가 벌컥 퉁명스러운 말을 뱉었다. "근데 꼭 이렇게 매달 가야 해? 매번 날짜를 정해두고 친정에 꼭 가야 하는 건 아니잖아". 갑작스러운 불평에 당황스러운 마음도 잠시, 속에서 짜증이 올라왔다. "겨우 한 달에 한번 가족들이랑 친구들 보러 가는 건데 그게 왜 불만이야?"라는 내 말에 남편은 "이제 여기가 너의 집이고 내가 네 가족인데 의무적으로 정해놓은 것처럼 매달 5일씩 가는 게 이해가 안 돼. 거리도 멀고 비용도 많이 나오는데 매달 꼭 정해두고 떠나야 해?"라고 반문했다.


 J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왕복 8시간 거리에 매달 항공료로 쓰는 비용도 상당했다. 본인은 바빠서 야근하느라 힘든데 내가 포르르 친정으로 가서 5일씩 돌아오질 않으니 서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이해심보다는 억울함이 먼저 튀어나왔다. '애초에 나는 A 지역에서 평생 살고 싶었는데 너랑 살겠다고 친구, 가족 다 놔두고 이 멀고도 낯선 지역까지 따라왔는데. 겨우 한 달에 5일 가족들 보는 게 뭐가 그리 불만이야? 너무한 거 아니야?' 


 결국 J가 한발 물러서며 우리의 다툼은 끝이 났지만 찝찝한 마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J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나는 결혼을 했고, 새로운 지역에 자리를 잡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내가 새로 뿌리를 내릴 곳은 J와 만든 새로운 가족이지만 나는 A 지역에 두고 온 가족들과 친구들, 28년간 유지했던 내 삶을 여전히 움켜쥐고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으려 아등바등하는 중이었다. J의 말처럼 이제 새로운 가정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다른 생각이 그 위를 덮었다. '내 친구들은 다들 원래 살던 곳 근처에서 결혼해서 원할 때는 아무 때나 가족도 보러 가고 친구도 보던데, 나는 연고도 없는 이 동네까지 와서 그 며칠 가족들 보는 거 때문에 다퉈야 해? 억울해!'. 부정적인 생각은 하면 할수록 꼬리를 물고 커져가고, 일주일간 끙끙 앓고 나서야 나는 겨우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여전히 완벽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결혼하고 독립하게 되었으니 새롭게 꾸린 가정에 집중하자는 J의 의견도, 새 가정을 꾸렸다해서 내 가족과 친구들, 내 오랜 삶이 남아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포기하기 싫다는 내 의견도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보던 동화책에서 욕심 많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 아이는 두 손에 초콜릿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운 사탕을 가지기 위해 애를 쓴다. 그때 어디서 나타난 어른이 "초콜릿도 잔뜩 가지고 있으면서 사탕도 가지려는 건 욕심쟁이야! 사탕을 가지고 싶다면 초콜릿은 손에서 내려놓으렴"이라고 조언한다. 그 동화가 주려는 교훈처럼 무언가를 새로 얻게 된다면 원래 가지고 있던걸 하나 버려야 할까? 그래야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일까?


 나는 단호하게 'No'라고 할 것이다. 초콜릿은 초콜릿이고 사탕은 사탕이다. 내가 욕심내는 것들은 애초에 쉽게 가졌다 필요가 사라진다고 쉽게 정리할 수 있는 물건 같은 존재가 아닐뿐더러, 둘 다 한 움큼 손에 쥐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에 가득 찬 욕심 때문에 팔이 아플 수도 있고, 떨어트릴까 봐 빠르게 뛰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빠르게 뛰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걸 손에 가득 담아 들고 천천히 풍경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며 천천히 걸어가면 문제없이 갈 수 있다. 28년간 나를 구성해 온 기존의 삶도, 3년간 새롭게 꾸려온 삶도 모두 '나'자신을 채우는 소중한 요소이다. 살면서 어느 정도는 내려놓거나 타협하는 순간이 분명 올 테지만, 내가 스스로 버겁다 느끼지 않을 때까지는 이 균형을 유지해보려 한다. 물론 욕심쟁이답게 동반자인 J와도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PS. J와는 충분한 대화를 통해 대안을 도출했다. J는 애초에 내가 A지역에 가는 것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매달 특정 날짜를 정해두고 떠나는 바람에 나와 하고 싶던 활동을 같이 못하는 게 서운했던 거였다. 그래서 J와의 일정을 우선순위에 두고 A지역 방문 일정은 융통성 있게 상황에 맞춰 조정하는 것으로 바꾸니 해결되었다. 역시 모든 다툼은 충분한 대화가 있다면 언제든 해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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