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_넌 어느 별에서 왔니?

30대 직장인의 자전적 소설

by 문득

오전 8시 59분, 최근 우리 팀으로 들어온 신입사원 A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사무실에 들어온다. 9시가 되기 1분 전이지만 한 손엔 별다방 커피를 들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내가 신입사원 교육을 받을 때만 해도, 9시는 출근시간이 아니라 일할 준비를 마쳐야 할 시간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최소 8시 반 이전에 와서 컴퓨터를 켜놓고, 조용히 인스턴트커피를 타면서 잠을 깨운 뒤 경건한 마음으로 9시를 맞이했다. 한때는 8시 50분이 되면 몸풀기 운동 음악이 나와 전 직원이 함께 체조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게 엊그제 같은데, A는 어떻게 1분도 안 늦고 딱 8시 59분에 출근할 수 있을까? 이것도 능력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든다.


9시 5분, 메신저에 A의 쪽지가 왔다.


'과장님, 어제 말씀해주신 내용을 보완해서 보고서 수정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ㅎㅎㅎㅎ'


A는 직접 와서 보고하기보다는, 쪽지로 보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사실 이렇게 쪽지로 보내면 잊어버릴 때도 있고, 뭐가 수정됐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불편하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다가 꼰대라는 인상을 심어줄까 봐 A가 하는 행동을 묵인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른 행동을 할 때면, 왠지 모르게 안에서 뜨겁게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느껴진다.


11시 55분, 메신저에 A의 채팅창이 뜬다.

'과장님, 저 오늘 점심 약속이 있어서 따로 먹을게요. 맛점하세용~!! ^^'


A는 참 인기가 많은 친구이다. 거의 매일 점심 약속을 잡고는 12시의 신데렐라가 되어 사라진다. 12시부터 1시까지는 법으로 정해진 휴게시간은 맞지만, 우리 팀은 구내식당에서 5분 컷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산책하는 뿌리 깊은 전통이 있다. 막내가 들어오면 커피 심부름에서 해방될까 내심 기대했지만, A의 빈자리에 난 9년째 막내 자리를 지키고 있다.


15시 30분, A가 결재 올린 문서를 차장님께 설명하고 있다. 글자크기, 글씨체, 줄간격 등 문서의 형식을 중요시하는 차장님에게는 A의 보고서가 허점 투성이다. A4용지 전체가 빨간펜으로 도배되어, 빨간 종이인지 흰 종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자리로 돌아온 A는 조용히 한숨을 쉬더니, 곧 나를 채팅창으로 불러낸다.


'선배님, 보고서 쓰다가 하루가 다 가네요. 너무 힘들어요 ㅠㅠ'


솔직히 여기엔 맞장구쳐 줄 수가 없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니다. 보고서는 연애편지와 같다. 온갖 정성과 노력이 들어간 편지에 진심까지 더해지면 누구든 감동받기 마련이다. 상사는 남자친구보다 더 만족시키기 어려운 존재이니 그분들을 위한 보고서는 연애편지보다 더 공들여서 예쁘게 써야 한다.


A의 투정 어린 한마디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간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르쳐줘야 하는 걸까? 어떻게 우리 회사에 들어왔지? 요즘 우리 회사의 인재상이 바뀌었나?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A는 나의 눈치를 살짝 보더니,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내 마음이 조금 불편해질 때쯤, A가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다.


'어디 갔다 왔어요?' A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옆팀에 있는 동기랑 노가리 까다 왔어요.'


음... 역시... A는 멘탈 하나는 갑 오브 갑이다. 멘탈에 문제가 있는 건 나다. 사소한 일 하나도 그냥 넘기지 못하고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편이어서 내가 오히려 A에게 배워야 할 점이 많다.


17시 59분, A의 컴퓨터 팬 돌아가는 소리가 멈춘다. 책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고, 퇴근인사를 한다.


"내일 뵙겠습니다."


야근하는 사람들끼리 간단히 저녁을 먹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들 빨리 집에 가기 위해 말없이 키보드만 열심히 두드리고 있다. 난 집중력이 떨어져 키보드를 두드리다 말고 잠깐 딴생각에 빠졌다.


'아, 오늘은 월요일이네. 주말까지 4일이나 남았군. 정말 최악이야.'


야근하는 건 익숙하지만, 오늘따라 짜증과 피로가 급격히 밀려온다. 머리를 식힐 겸 잠시 회사 옥상으로 올라왔다. 바삐 돌아가는 러닝머신, 빽빽하게 도로를 메운 차들, 맛집에 길게 줄 선 사람들 사이로 불 켜진 사무실이 도시를 환히 비추고 있다.


'난 지금 누굴 위한 인생을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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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출처: 생텍쥐페리 책 '어린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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