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에서 보내는 시편지
산이 내어준 자리에 앉아
산에 안긴다
산에서는
시퍼런 욕망의 가시들이 내려앉고
하얀 무욕이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산에서 꾸는 꿈이
얼마나 애틋한지
어둠 속에서 빛이 번지고
기다림 속에서 꽃이 피고
떨림 속에서 단풍이 들고
산에서 만나는 삶은
얼마나 다정한지
들꽃과 바람
바위와 물
나무와 새
산이 안아준 나를
다시 안아주는 나
드디어 만난
나의 길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나는 너의 말을 들어주고, 너를 도와주고 너를 안아주는데
정작 나는 누구에게 마음을 시원히 털어놓으며 편안히 기대어 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문득 울적한 날이 있습니다.
어머니도 언니 오빠도, 남편도 곁에 있지만 가족에게조차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남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속 깊은 마음은 어디에도 쉽게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럴 때면 마당을 나오다 보이는 부드러운 산이 위로가 되어줍니다.
묵묵히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11월 산빛은 더는 꽃내음으로 배부르지 않지만, 풍성히 달고 있던 잎과 열매를 내려놓은 애잔한 나무에 마음이 한참 머무릅니다.
그 나무들 사이를 천천히 걷는 동안, 어둑하게 남아 있던 감정들이 어느새 조용히 흘러내립니다.
숲의 고요함에 파묻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뜨거운 감정이 조용히 목을 타고 내려옵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 시절, 잠시 교사 일을 쉬며 그동안 해주지 못했던 엄마의 역할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이웃이 ‘홍길순’이라 부를 만큼, 유모차에 둘째를 태우고 큰아이 학교와 도서관, 마트, 공원을 부지런히 오갔지요. 비 오는 날엔 우산이, 추운 날엔 이불이, 눈 오는 날엔 두꺼운 비닐이 덮인 유모차로 둘째는 계절을 견디며 자랐습니다.
그간 일만 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살림도 알뜰히 챙겼습니다. 못하는 요리지만 아이가 좋아하는 밀가루로 만드는 요리에 도전하고 간식도 틈틈이 챙겼지요.
가을볕이 따뜻한 날엔 돗자리를 챙겨 큰아이를 마중 나갑니다. 직접 싼 김밥에 따뜻한 물과 주스, 찐 밤 등을 잔뜩 싸서 큰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힘껏 올라갑니다. 아이 학교가 아파트 뒷산 꼭대기에 있었거든요. 그때는 힘이 꽤 셌나 봐요. 둘째를 태운 유모차를 힘차게 밀면서 쉬지 않고 올라갔으니까요. 큰딸을 반갑게 만나면 바로 공원으로 향합니다. 공원에는 운동시설이 잘 되어 있고 산책로도 아름답고 축구장과 배드민턴장, 농구장이 따로 있어 학생들이 참 많이 이용하는데 조금 더 옆으로 내려가거나 위로 올라가면 돗자리를 펼쳐놓고 편안히 쉴 수 있어 어린아이들과 부모님들께서 자주 이용하십니다. 저희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공원 맨 꼭대기로 올라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한적한 곳에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과와 찐 밤, 김밥을 먹고 나면 큰아이와 둘째가 신나게 춤을 춥니다. 저는 손뼉을 치면서 노래하고요.
뽀로로, 뿡뿡이, 둘리... 산속 공원에서 펼쳐낸 너무나 예쁜 추억입니다.
“엄마, 내일은 줄넘기도 챙겨서 와줘”
대학생인 큰딸과 중학생 둘째 딸은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요? 아이들과 바라본 산의 모습, 공원에서의 웃음, 그리고 엄마로서의 시간은 두 아이에게 어떤 위로와 힘으로 남았을까요.
또 크리스마스 이브 아침, 학교로 향하는 제 모습도 떠오릅니다.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한 선물로 양말을 준비해 커다란 봉지 안에 담고는 제 몸에 크리스마스트리 반짝이 장식줄을 둘렀습니다. 그리고 출근합니다. 이상하지요. 그때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으니까요. 빨리 등교해야 깜짝 선물을 줄 수 있겠다 싶어 해가 뜨지 않은 시각에 출발합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때마침 눈이 와 그 눈길을 신나게 뛰어서 갑니다. 산타 모자에 반짝이 장식을 잔뜩 하고요.
“선생님께서 주신 양말, 참 따뜻해요”
그때 나의 제자들은 담임 선생님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자연은 이렇게 때로는 엄마로, 때로는 선생님으로 살아가는 내 삶과 추억을 온전히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제 홀로 산길을 걸으며 잔잔히 속삭입니다.
"참 아름다웠어"
"나도 충분히 그랬어"
이 말을 천천히 삼키자 지난 시간이 따뜻한 위로와 용기가 되어 몸속 가득 번집니다.
다시 가을에서 겨울로 기울어지는 산, 차가운 바람과 함께 떨어지는 잎을 내년 봄에 새롭게 만난다는 생각을 하니 나도 뭔가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산에서 다시 얻은 용기로
오늘도 나의 길을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