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는 사랑입니다.
어떤 날
추억이 내게로 와
온몸이 두근두근 간질거리고
감각이 활짝 열리면
고였던 말들이 터져 나온다
꼬리를 길게 물고 이어지는
탄식의 마디마다
묵은 감정을 애처로이 떠내면
흥건히 젖은 언어가 흘러내리고
주름진 생각이 곧게 펼쳐진다
그런 날
황홀히 짜낸 물빛 시간들을
꼭꼭 눌러 고운 체로 건져내니
온몸에 새봄이 돋아 사랑이 오르고
함박웃음으로 시가 나왔다
오늘은
너의 위로를 깊이 들이마시며
천천히 내쉰다
끈끈한 시를
너에게 부친다
시는 사랑입니다.
어릴 적 막연히 윤동주 시의 감수성이 참 좋아 나도 그런 언어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 국어 교사가 되었습니다.
수업 시간이 되면 그날 함께 읽고 싶은 시를 복사해서 아이들에게 나눠주었고 본격적인 수업에 앞서 함께 읽었습니다. 약 2-3분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아이들과 저는 시를 통해서 그날의 수업을 활기차게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시를 아이들과 나누던 어느 날, 중세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는데 미리 배운 저로서는 쉬운 내용이었지만 관심도 없이 처음 접한 우리 아이들에게는 딱딱하고 어려운 글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까..... 한참 생각하다가 갑자기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로 이 글자들의 의미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치음의 변화를 가르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때 나온 내용이 '마음'의 이응이 중세국어에서는 반치음이었다'는 부분이었지요. 아이들에게 제 마음을 담은 시를 보여주었습니다.
‘마음’은 원래 세모였어. 그런데 세모면 마음이 아프잖아.
이렇게 저렇게 치이다 마음이 결국 둥그러진 거야.
마음이 아픈 상처를 보듬고 보듬어 그렇게 부드러워진거야.
아! 수업은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었어.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에게 사랑의 동그라미를 그려주는 것
“오늘 배운 내용 알았니”로 마무리 짓는 수업이 아니라,
“너희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로 마무리 지어야겠다.
순경음 비읍(ㅸ)을 가르칠 때는
얼마나 순해지고 싶어 순경음을 만들었을까?
만든 사람의 인품이 그 안에 느껴진다.
이 글자를 가르칠 때마다 나도 순해지는 것 같다.
누우면(누ᄫㅓ셔) 순해지고, 쉬우면(수ᄫㅣ) 순해져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 순한 선생님이고 싶나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글자가 왜 사라졌을까?
가끔씩 사라져간 것들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게 더 많이 사라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조금은 허술할 수 있지만 이렇게 시로 아이들이 어려워하는 중세국어를 만나게 해 주자 수업시간이 참 행복했습니다.
저는 평소에는 수줍음이 많지만 제가 좋아하는 일이 생기면 남들의 시선에서 오는 부끄러움을 생각하지 않고 훨훨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그런 마음이 이상하게도 생깁니다. 참 내성적인 사람인데도요.
이렇게 시는 제 수업 시간을 언제나 함께 밝혀주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지내는 아이들의 모습을 시로 담아 학급문집을 만들다가 나이가 들면서는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시를 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그런 재주가 저에게는 참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시 쓰기는 저를 꼼짝없이 못 일어날 것 같은 날에도 설렘으로 다시 일으켜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인연을 맺었던 분이 생각나면 그분을 위한 언어가 떠오릅니다.
그 언어를 따라가다 보면 제게 작은 미소를 짓게 하는 시가 나옵니다.
비록 주목받지 못하는 엉성한 시일 수 있지만 온전히 제 마음을 담아 그분께 드리는 글이기에 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애틋한 시편지로 완성되었습니다.
저를 사랑으로 낳아 길러준 부모님, 그리고 어릴 적 밥과 잠과 다툼 속에서 함께 자랐던 언니 오빠들, 새로운 사랑으로 만난 남편과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두 딸, 그리고 함께 일하는 동료, 이웃, 친구들.....
그들을 그리워하며 그때 그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 <시로와, 당신에게 보내는 시편지>에 담았습니다. 그렇게 총 30편을요.
누군가를 생각할 때는 다양한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고마움의 결부터 섭섭함과 아쉬움, 때로는 미움의 결까지...
사람 사이에 어찌 좋은 감정만 있을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아련히 그들을 기억하는 건 따뜻한 고마움이 가장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복잡한 감정과 아련함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시를 씁니다.
쓰고 나니 가장 잘 어울리는 예쁜 옷으로 갈아입은 느낌이 듭니다.
그리움과 아쉬움, 후회로 마음 태우던 날들을 그대로 시에 담아 부서진 제 감정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따뜻하게 만져주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시는 그들과 나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가 나오고
시가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동료 교사와 주고받는 업무처리 메시지에도 시의 언어를 생각해 따뜻하고 부드럽게 보내드립니다.
일 년의 교육활동을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 쌓인 일 속에서 여유가 없는 요즘입니다.
그럼에도 잠깐이라도 주고받는 메시지가 작은 힘이 될 수 있다면
부족한 표현이더라도 제 마음을 담은 시편지는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저는 “시는 사랑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