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을 나눈 아이들과 함께
우리들의 학습목표
시소샘
아이들이 나를 바라본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공손하게 인사한다.
아이들이 초롱초롱 눈빛을 밝히며 경청한다.
선생님이 정한 학습목표이다.
아이들은 누워있다.
아이들은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아이들이 정한 학습목표이다.
나는 오늘도 두 학습목표 사이에 서 있다.
그 사이에는 늘 강이 흐른다.
나의 마음이 흐르고 아이들의 마음이 흘러
강물이 깊어지고 맑아지면
오늘은 어제보다 오분 더 서로를 바라봐준다.
나와 너희들의 사이에 무엇이 있어야 하나?
선생님과 아이들이 사이에서 함께 만나
물장구라도 치며 신명나게 놀아보고 싶다.
육아 휴직 후 남고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남녀공학에서만 근무했고 특히나 여학생들과 마음이 잘 통했던 저로서는 남고로 출근한다는 게 꽤 겁이 났습니다. 교사들은 2월이 끝나고 3월을 맞이할 때 마음이 꽤 심란한데 저는 특히나 더 심해서 입학식 전날엔 악몽까지 꾸고 출근하게 되었지요.
잔뜩 겁먹고 교무실에 들어갔는데 그때 옆자리 선배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에 조금은 용기가 생겼습니다.
“여기 남학생들은 공부만 좀 관심 없지 정말 착해요”
그 전 학교는 반 순서대로 교무실 자리를 정해서 앉았는데 여기 부장님은 나름 깊은 생각이 있으셨을 거라고 지금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신규 교사나 전입 교사들 자리를 기존에 계셨던 선생님 옆자리로 마련해주셨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낯선 학교였지만 금방 따뜻하게 젖어 들 수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교실로 향하니 무섭다고 생각한 남학생들이 너무나 순한 양처럼, 아주 귀여운 토끼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기 초의 분주함을 지나 본격적으로 수업 연구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국어 수업을 참 어려워했습니다. 제가 워낙에 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시나 소설 수업은 저도 모르게 흥이 나 참 재미있게 이어간 것 같은데(그때 아이들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비문학 수업, 특히 과학이나 기술, 정보 등 제가 약한 부분의 글을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다 보면 글을 읽다가 조는 친구들이 종종 발생하기 시작하지요. 저는 어떻게든 그날의 학습 목표에 충실해야 하고 옆 반 선생님과 진도를 맞추기 위해 혼자 수업을 열심히 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들이 앉아서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여주고 빙그레 웃어줘서 저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종이 자료도 많이 만들고 시각 자료도 다양하게 만들어 제시했지요. 50분 수업이 빠듯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첫 중간고사 결과를 보니 아이들은 제 수업을 이해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참 고맙게도 저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막말을 하거나 돌아다니지 않고 교실에 예쁘게 앉아만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수업이 의미가 있을까? 그때 이후로 참 많이 고민했습니다.
성실은 자신 있지만 재미는 자신 없는 저는 아이들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수업을 만들고 싶었고 그때 이후로 관련 연수를 찾아다니면서 배움 중심 수업에 대해 꾸준히 고민했습니다.
일단 제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시작해 보고 싶어 국어 공부에 시와 노래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보았지요. 제 별칭도 ‘시소샘’으로 정했습니다. 시를 소개하는 선생님 혹은 시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선생님 혹은 시소를 타듯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다정히 바라보고 싶은 선생님이라는 의미였지요. 아이들이 시소샘이라고 부를 때 저는 참 행복했어요.
진로교사가 된 지금은 저를 별숲지기라고 부르는데 저는 아직도 시소샘이 좋아 스스로 별숲지기 시소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법을 가르칠 때는 산토끼 노래를 개사해서 ‘체언은 명대수, 용언은 동형사, 체언 뒤에 조사 붙고 용언은 활용해’ 이런 식으로 간단히 노래로 먼저 부르게 한 후 그 의미를 조금씩 천천히 설명해 주고, 먼저 이해한 친구들이 다른 친구들에게 설명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교실이 와글와글, 재미있는 교실로 피어나기 시작했지요.
저는 항상 문을 여는 출근을 하는 사람인데 7시면 학교에 도착해 아이들을 맞이했고 함께 한자 성어를 공부했습니다. 한자성어와 속담 책받침을 만들어 아이들이 자주 보면서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요. 그때는 수능에도 종종 나왔으니까요.
아침 일찍 등교하는 친구들과는 식빵에 잼을 발라 먹으면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깊어지자 점차 어려운 고민들이 쉽게 풀려갔습니다.
그러던 중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지요.
학교에서 잠을 좀 많이 잔다고 생각했지만, 집에서 밤늦도록 게임에 그렇게까지 빠져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머님과의 상담 후 아이의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점심시간마다 그 아이를 상담실로 데려가서 게임중독이었던 아이가 문제를 해결해 나간 동화책을 조금씩 읽어주었습니다.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 도서관에서 ‘그림책으로 하는 독서치료’라는 프로그램을 6개월간 참여하면서 그림책의 효과를 알게 되었던 터라 우리 학생에게 적극적으로 읽어주고 싶었습니다.
“00야, 오늘은 여기까지 읽어줄게. 지금 너의 기분이 어때?”
이렇게 하다 보면 조금씩 좋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고민 끝에 몽골 유학을 결정하게 되었지요. 손재주가 좋아 상표 디자인에 관심이 많고 마음이 단정하고 따뜻한 아이였습니다.
먼 곳으로 떠나는 친구를 그냥 보낼 수 없어 환송회를 우리집에서 해주기로 했습니다. 당시 저는 마당 있는 햇살 좋은 집에 살고 싶어서 1층은 집주인이 거주하고 2층에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워낙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대학교 때 공부했던 책까지 꽂힌 큰 책장이 5개나 있어 15평 정도 공간에서 네 식구가 사는 게 비좁은 상황이었는데 이 공간에 우리 반 아이들을 모두 초대한 거지요.
그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큰딸은 그때를 회상하며 지금 말합니다. “엄마는 참 대단했어”
저희 반 반장의 꿈이 조리사였습니다. 그 아이가 라면을 끓이고 실용음악을 준비하던 다른 친구가 기타로 노래해 주고 옹기종기 모인 친구들이 새로운 도전을 축하해주고. 그날의 환송회는 따뜻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학교에 5년 있는 동안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찾아 여기저기 떠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모두 꿈을 이루었지요. 그때 그 아이들을 3학년 때 가르치고 싶어서 함께 올라가 3학년 담임까지 했으니까요.
어느날 이메일을 열어보니 몽골 유학을 간 학생의 어머니께 사진과 함께 편지가 왔습니다. 아이가 잘 자라서 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교는 미국으로 갔다고 하면서요. 이 소식을 접한 저는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나오는데 한 남자가 막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 00예요. 물리치료사가 되었어요.”
정말 예쁘고 다정한 아이였지요.
남고에서 지냈던 날들은 교사로서 저를 더 성숙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때, 그 아이들과 공부하면서 지었던 시를 다시 꺼내니 아이들이 참 그립습니다. 이젠 아저씨라고 해야 할까요? 다들 어른이 되어 어디선가 또 다른 꿈에 도전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 꿈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힘차게 한참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학교에 갑니다.
학교 가는 길은 저에겐 늘 눈부신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