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 과목

- 숨결의 반복과 변주,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꽃

by 별숲지기


산(山) 과목

- 시소샘


어릴 적 산(山) 과목이 있었더라면

산수에서 복잡한 수(數)를 내려놓고

셈 산(算)이 아닌 뫼 산(山)을 배웠더라면

지금쯤 더 넓은 하늘을 품고 있지 않았을까?


높은 산길을 홀로 걷다 보면

사각의 책과 교실에서는 알 수 없었던

다름의 공존이 만들어내는 아늑한 울림에

눈과 귀가 기울어지며 젖어든다


부드러운 모랫길과 거친 돌길이 있어

빠름과 느림의 발자국으로 여린 풍경에 눈맞추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있어

스치는 바람으로 맺힌 가슴을 한올 한올 풀어주고

바닥에서부터 걸어 올라간 산마루가 있어

뿌듯한 숨만 남기고 떠나는 초연함에 빠질 수 있고


숨을 거둔 자의 적막한 집과

숨을 고르는 자의 열매 사이에서

삶과 죽음에 겸허해질 수 있고


꽃도 열매도 잎도 서서히 내주어야

앙상하고 하양 겨울 속에서

가득하고 푸른 봄을 꿈꿀 수 있으니


짜릿한 산(山) 과목의 멋을

고목으로만 쓸쓸해가는 나이에서가 아니라

붉은 숫자로 얼룩진 아이들의 가슴에 심어준다면

살찐 숫자들로 차갑게 밀려나는 산들이 줄어들 텐데


선창과 후창의 주고받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듯

빛은 어둠으로 스러지고 다시 빛으로 올라와 산노을을 펼치고

봄은 여름에서 가을로 번지어 겨울까지 내려와 다시 봄으로 흐르니

나와 너의 사이에서 새로이 피어나는 산의 노래가

이 땅의 꿈이 될 텐데


능선에 앉아

산(山) 과목을 배울 수 있다면





저는 교사지만 교육문제는 어디서나 쉽게 말을 꺼내기 힘듭니다. 각자의 관점 차이 때문이지요. 이것이 옳고 저것이 틀렸다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고교학점제......

1년을 지내고 나니 그간 어땠는지 잠깐 말하고 싶습니다.

언론에서는 그것 때문에 고등학교 교사들이 중학교로 내신서를 많이 쓴다고 하던데.

글쎄요, 20년 넘게 고등학교에서만 근무해 온 저로서는 선뜻 중학교로 옮기기를 결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쌓인 제 모든 습관이 고등학교에 맞춰져 있다 보니, 중학교는 저에게 아직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물론 중·고등학교를 모두 경험하신 선생님들은 두 환경을 비교할 수 있기에 저와는 다른 생각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느 한쪽이 더 쉽거나 편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자리마다 고유한 어려움이 있을 테니까요.


국어 교사일 때는 아담한 공간에서 제가 담당하게 된 아이들 그리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정답게 의지하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진로 교사가 되니 까마득히 넓은 공간에 홀로 남겨진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제 역량을 더 넓게 비추어야 하는데 혼자 해야 하니 가끔 빛이 어수선하게 퍼지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길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 다독였지요. 진로 교사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던 그 마음, 그 마음을 잃지 말자고 하면서요.


아침 7시 30분이면 1학년 여학생이 나로와 서당(진로 탐색실)으로 찾아옵니다. 제가 아침에도 문을 열 테니 진로 탐색을 하고 싶은 친구들은 자유롭게 오라고 했기 때문이지요. 10분 후에는 남학생이 들어오고, 8시가 지나면 2-3명 정도가 불규칙적으로 다녀갑니다. 5월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풍경은 그대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12월, 매일 아침 자습에 참여하는 그 여학생과 남학생이 진로 에세이를 써서 저에게 제출했습니다. 1년의 학교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꿈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그 진로 에세이가 그간의 여러 감정 속에서 흔들렸던 제 마음을 더 단단하게 잡아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학교 총 1215명의 이름을 보면서 하나하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끄럽게도 제가 진로 수업하는 아이들과 나로와서당에 찾아오는 아이들, 그리고 진로상담을 신청하는 아이들만 챙겨준 것 같습니다.


다시 고교학점제,

학교에서 제일 민감한 부분이 교육과정 설계였습니다.

고교학점제와 바뀐 수능을 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교육과정을 협의하는 시간이지만 마음을 툭 터놓고 편하게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서로 간 불편함이 참 많습니다.

치열하게 진행한 여러 차례 협의 끝에

결론은 국어 영어 수학의 단위 수를 늘려 많이 배우게 하고 과학도 이공계를 선택한 학생이라면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는 구조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수학, 중국어, 일본어, 기술 가정, 미술창작, 음악 연주와 창작은 영역을 함께 묶어놓고 이중 2개를 선택하게 되어 있어 아무래도 이공계 학생들은 인공지능 수학과 기술 가정으로, 문과 계열 학생들은 중국어나 일본어, 미술이나 음악을 선택하는 구조가 되는 거지요.

문제는 요즘 많은 학생들이 이공계 진학을 계획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흐름을 누가 탓할 수는 없겠지만, 그 속에서도 인문학과 예술만은 외면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진로 교사로서 그간의 협의과정을 바라보면서 선생님들의 모든 상황에 공감이 되어 안타까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고1 학생들은 내년도 수업을 위한 교과 선택을 5월부터 시작합니다. 1차부터 3차에 걸쳐 선택 과정이 진행되고, 9월쯤이 되면 다음 해 교과서 신청을 위해 대부분의 최종 결정이 이루어지지요.


저와 함께 아침 자습을 하면서 친해진 학생이 있습니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해 점심시간에는 제가 운영하는 나로와 서당 옆 복도에 마련된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치는데 정말 잘 칩니다. 그 소리에 저절로 끌려 제가 옆에 가서 노래를 부를 정도로 정말 사랑스럽게 연주하지요.

음악을 사랑하는 그 친구는 건축가가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공학계열의 과목을 선택해야 하는 거지요. 저에게 고민을 살짝 흘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참 많이 들려주던 학생이라 어느 정도 상황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 선생님 그리고 과학 선생님과 상담한 후 저에게 찾아왔지요. 표정이 매우 어두웠습니다.


“선생님, 저는 '로봇'에 관심이 없고 음악을 좋아하는데 모두들 공학계열이니 과학과 공학계열의 교과로만 선택하는게 입시에 유리하다고 해요. 정말 그런 거예요?”


아이는 전에 저와 상담할 때 2학년 1학기 때는 인공지능 수학과 기술가정, 2학기 때는 기하와 음악과 미디어, 3학년 1학기 때는 창의공학 설계 이렇게 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다들 ‘음악과 미디어’를 왜 선택하냐고 했나 봅니다. 그 과목이 아니라 ‘로봇과 공학세계’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지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각 대학교에서 발표한 필수와 권장과목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서울대학교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열려있고 계열별 과목 선택의 제한을 두지 않는 대학도 있어 앞으로의 추세도 이야기해 주었지요.

그리고 공학계열이라고 해서 공학과 관련된 모든 과목을 들을 필요는 없다고 말해주면서, 객관적인 정보 제공과 함께 주관적인 제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건축가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건축물로 완성이 될까? 음악을 모르는 건축가와 음악을 아는 건축가는 뭔가 다를 것 같은데. 나는 왠지 네가 지은 그곳에는 음악이 들릴 것 같아. 너무나 기대가 된다.”


“나는 너의 선택을 응원할게. 어떤 것을 선택하든 네가 그 과목을 왜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너의 철학이 있으면 되는 거야. 그리고 선택한 그 순간부터 그 과목은 너의 삶의 일부분이 되는 거란다.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배우다 보면 그 안에서 또 다른 길이 보이게 될 거야.”


그렇게 말을 해주었지만 아이는 계속 불안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돌아간 후 전화가 왔습니다. 과학부를 맡고 있는 부장님이었지요. 저와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찾아오셨습니다.


“부장님, 00 아이와 상담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상담하셨어요?”


“저는 아이에게 대학별 상황을 보여주면서 참고하라고 했고 제 생각을 들려주었어요. 대학에서 꼭 들어야 한다고 제시하지 않았다면 그 나머지는 너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했지요. 네가 잘할 수 있고 잘하고 싶은 것으로 하라고요.”


“그러셨군요. 저는 아이들에게 이공계열이면 그 계열과 관련된 과목만 다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제가 너무 강하게 말했나 봐요.”


“아니에요. 부장님. 요즘 분위기가 그러니 부장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거지요. 그런데 저는 강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못돼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랍니다.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그래도 부장님, 이공계 계열이라면 과학과 공학 계열을 집중해서 배워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집중해서 배우면 좋겠지요. 그런데 아이가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선택하는 것에 갈등이 있는 것 같아 제가 음악을 선택하는 것도 괜찮다고 한 거예요. 그 선택을 하게 된 동기만 뚜렷하다면요”


“그럼, 그 학생이 이따가 다시 찾아온다고 했는데요. 그 학생에게 과학과 공학을 집중해서 배우는 게 도움이 된다고 다시 말해줘도 될까요”


“그럼요 부장님. 이제 중요한 건 아이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아이가 현명하게 잘 선택할 거로 저는 믿어요.”


결국 우리 아이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아이는 음악이 아닌 ‘로봇과 공학설계’로 선택했습니다.

마지막 결과는 저에게 말해주지 않았지요.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았어요.

저는 아이가 무엇을 선택하든 선택 이후에는 그 교과에 대해 애정을 갖고 배워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는데 아이는 제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게 미안했나 봅니다.

그래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음악은 여전히 아이의 소중한 취미로 남을 것이고,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다소 어려울지라도 선택한 교과에 용기 있게 도전해 나갈 거라는 것을요.


며칠 전 아이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수 황가람의 ‘나는 반딧불’이었지요.

아이가 피아노로 연주하고 저는 노래를 불렀어요. 그리고 부끄럽지만 노래를 마치고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지요.


“네가 자주 나로와 서당을 찾아주니까 선생님이 더 건강해지고 행복해.”


“저도 선생님을 볼 때마다 용기가 생기고 기분이 좋아요”


워낙 씩씩하고 긍정적인 학생이라 다른 선생님들께도 그런 말을 하겠지만 그래도 이 순간 아이의 진심이 느껴져 정말 행복했습니다.


고교학점제로 인해 교과 선택에 대한 갈등이 많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나니 이젠 우리 아이들의 선택을 응원하는 마음, 그리고 떠나시게 된 선생님들의 또 다른 곳에서의 도전을 격려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새로운 고교학점제 도입으로 출결과 수업, 행사, 상담 등 하루도 쉬는 시간이 없었던, 복도에서 보게 되면 늘 뛰어다니셨던 1학년부 열두 명의 담임 선생님과 1학년 부장님, 그리고 미도달 학생이 나오지 않게 하려고 이리저리 고민하면서 수업과 평가를 계획하신 1학년 교과를 맡으셨던 선생님들, 최소성취수준 보장지도로 누구보다 마음 애태우며 고생하신 연구 부장님, 교육과정 설계로 여러 선생님의 상황을 보면서 마음 힘들었을 교육과정 부장님, 그리고 학교의 모든 것들을 총괄하신 교무부장님 등.


지금 저는 이 일들을 모두 해 내신 선생님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비록 각자 맡은 일들이 너무나 벅차고 힘들어서 순간순간 쌓인 오해와 갈등으로 감정적으로 부딪치며 힘들었던 날들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아이들을 위한 일이었고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이만큼 성장해 일 년의 학교 활동을 성찰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로 에세이로 써냈다고 생각하니 시간과 공간을 함께 한 선생님들이 모두 대단하고 존경스럽습니다.


특히 저와 함께 아침 자습을 매일 한 두 아이의 진로 에세이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그 글을 제가 아는 분들과 공유하고 싶어 아이에게 물어보았더니 기쁜 마음으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존경하는 다른 학교 진로 부장님께 보내드렸더니 역시 흐뭇해하시며 저를 응원해 주셨습니다.


겨울방학 기간 저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학년말로 너무 바빠 정리가 잘되지 않지만 그간 진행했던 나로와 서당의 활동을 천천히 성찰하면서 하나하나 글로 남겨보려고 합니다.

일 년간 이 안에서 방황도 많았지만 그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성장한 게 많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일 년 만에 지금의 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래도 기록으로 남긴다면 진로 교육에 관심 있는 분들께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고 앞으로 제가 어떤 학교로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경험이 새로 시작하는 학교에서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뭐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처음 진로 교사로 이 학교에 왔을 때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그리고 각 부서 부장님들과 협의하는 공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학교 진로 로드맵을 짜보았어요. 1학년은 여기저기 탐색하면서 꿈을 모아가야 하므로 ‘꿈모아’, 2학년은 조금 더 자신의 관심사에 깊이 파고 들어가 힘껏 날아보는 ‘꿈나래’, 3학년은 이제 그 꿈들을 단단히 모아 펼쳐보는 그래서 꿈이 곧 노래가 되어 꿈을 타고 노래하는 ‘꿈타래’라고 지어보았습니다”


“저는 책을 통한 진로 교육을 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책속에서 길찾기’라는 프로그램을 5회 진행해 보려고 해요. 5권의 책 중 다른 책들은 혼자 틈틈이 읽어도 되지만 ‘고전에서 길찾기’를 하기 위해 선택한 ‘열하일기’는 우리 아이들이 긴 시간 읽을 수 있도록 교과 시간과 진로탐색 시간에 함께 참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우리 아이들이 졸업하기 전에 꼭 고전을 진심으로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라서요.”


그땐 이렇게 씩씩하게 말했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니 제가 세웠던 계획을 얼마나 잘 실천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열하일기만큼은 캠프도 열어 우리 친구들에게 매일 조금씩이라도 고전을 만나게 했고 고미숙 선생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 어려운 열하일기를 조금이라도 알게 했으니 그것만큼은 어느 정도 제가 세운 계획을 실천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지원이 새로운 땅에서 느꼈던 그 벅찬 감동을 저와 우리 아이들이 생생하게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는 도전 속에서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설계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교무실 제 자리에 앉으면 등 뒤에는 제가 돌봐주고 싶은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36 학급 1215명 아이들의 이름이지요. 모두 다 만나고 싶었지만 생각만큼 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시 속의 ‘산 과목’은 제가 만든 나로와 서당을 통해 실현하고 싶었던 꿈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나로와서당 별숲지기 시소샘’은 어디서든 지금과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가라앉았던 마음에 또 새로운 용기가 피어납니다.


서서히 당당하게, 나를 향해 가는 길을 아이들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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