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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균탁commune Jan 22. 2023

코뮤니스트의 여행

이육사문학관을 가다, 꼭 가봐야할 바로 그 장소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번지에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뜻깊은 장소가 있다. 일제의 폭력 앞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오며 절개를 지킨 사람, 온갖 고문과 고초에 병을 얻어 직접 투쟁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글로써 끝까지 저항의지를 꺾지 않았던 사람, 그의 고향이 바로 도산면 원촌리에 있는 것이다.                                                                         


 ‘원촌(遠村)’이라는 지명은 그 이름부터 우리의 흥미를 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마을의 이름이 생기기 전, 사람들은 이곳을 ‘말 맨데’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분지를 둘러싼 산 중턱에서 말을 키웠기 때문이고, 이곳에 ‘역(驛)’이 있어 말을 바꿔 타고가거나, 쉬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 맨데’라는 발음을 직접해보면 느껴지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발음이 너무……, 너무……,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이름을 빠르게 연속으로 발음해 ‘먼먼데’라 불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역시 ‘말 맨데’를 계속 발음해보라. 그러면 결국 ‘먼먼데’와 유사한 발음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에도 문제가 있다. 다시 함께 ‘먼먼데’를 발음해보면 알 것이다. ‘먼’이 두 번 중복되어 이 이름 역시 발음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발음의 편의를 위해 한 글자를 줄여 이 마을을 ‘먼데’라고 불렀다. 그리고 행정구역으로 재편되면서 마을은 ‘멀리 있는 곳’, ‘멀리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멀 원(遠)’과 ‘마을 촌(村)’이 합쳐진 원촌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마을에는 우리가 꼭 기억해야만 할 아니 기억 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는 사람, 한 손에는 총을 들고, 한 손에는 펜을 든 강렬한 이미지를 가진 저항 시인이 있다. 그는 1944년 조선 내 무장투쟁을 도모하기 위해 국내 무기 반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북경으로 이송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으며, 그가 남긴 시는 대한민국의 제1차 교육과정이 성립된 1954년부터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되어 우리 의식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2022년 전국수학능력평가 국어영역 현대문학 시 부분에도 그의 시 <초가>가 문제로 출제되어 다시 한 번 그가 남긴 문학의 중요성이 재조명되었다.                                                                                    


 이쯤 되면 그가 누구인지 다들 짐작했을 것이다. 그는 바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 선생(陸史 李源祿, 1904~1944)이다. 그리고 도산면 백운로 525번지에는 그의 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전하고,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건립된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약산 김원봉 선생이 교장으로서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해 무장 투쟁을 이어온 것은 물론이고, 「청포도」, 「절정」, 「광야」, 「꽃」, 「교목」 등의 절창을 통해 굴복하지 않는 민족정신을 이어온 육사 이원록 선생의 독립 투쟁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한 이육사문학관이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다.                                                                             

 선생은 1904년 5월 18일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한말 일제에 맞선 의병장 허형(許蘅)의 딸 허길(許佶)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09년부터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916년부터 보문의숙과 이를 공립으로 개편한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또한 1924년부터 1927년까지는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을 했으며 1927년에 일어난 ‘장진홍의사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파사건(10월18일)’에 연루되어 1년 7개월의 수감생활을 겪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는 이후 이육사(李陸史)로 일제에 항거하는 선생의 필명이 되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원록이라는 그의 본명보다 이육사라는 필명을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이육사문학관을 방문하게 되면 우리가 꼭 기억하고 가야만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선생의 이름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육사라고 알고 있는 선생의 이름은 총 여덟 개나 된다. 이 여덟 개의 이름만 다 기억해도 선생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어떠한 생각으로 독립투쟁에 뛰어 들었는지 알게 된다. 

 선생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원삼(源三)’으로 불렸다. 동네의 친구들과 어른들은 그를 ‘원삼아’라고 불렀다고한다. 그리고 옛 어른들이 그렇듯 그 역시 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자는 ‘태경(台卿)’이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름인 ‘이육사’, 이 이름도 한글 표현은 같지만 다른 뜻을 지닌 네 개의 이름이 있다. 그가 처음 이육사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대구사회단체개관」이라는 글에서였다. 그는 이 글에서 수인번호 즉, 숫자로 된 이름인 대구 이육사(大丘 二六四)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그 뒤 육사라는 이름은 변화를 겪게 되는데, 처음에는 ‘고기 육(肉)’과 ‘쏟을 사(瀉)’를 쓴 ‘육사(肉瀉)’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는 당대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쓴 이름으로, 고기를 먹는다는 것, 그건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고,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일제의 편에 서서 아첨과 아부를 했다는 뜻일 것이다. 즉, 그렇게 해서 부를 축적한 사람은 분명히 탈이 나게 될 것인데, ‘쏟을 사(瀉)’자에는 ‘설사’를 한다는 뜻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즉, ‘고기를 먹은 사람은 반드시 설사를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일제에 아첨하는 사람은 반드시 탈이 날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선생이 다음으로 사용한 이름은 ‘죽일 육(戮)’자에 ‘역사 사(史)’라는 이름이었다. ‘역사를 죽이겠다’는 의미인데, 일제에 의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이름은 일제의 감시 대상이었던 선생에게는 위험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집안 어른의 권유로 같은 의미를 지닌 ‘뭍 육(陸)’에 ‘역사 사(史)’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인 이육사(李陸史)가 된 것이다. 즉 이육사와 관련된 이름만 해도 총 4개로 그의 삶과 내력을 짐작하게 해준다. 지금까지 필자는 총 7개의 이름에 대해 말했다. 앞에서는 8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왜 7개만 말했냐하면, 나머지 1개의 이름을 알기 위해서는 선생이 가졌던 직업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직업을 ‘시인’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진짜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그는 ‘중외일보 대구지국’과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기자 생활을 하며 쓴 기사와 평론에 주로 사용했던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이활(李活)’이다. 

 얼마 전 이육사 선생이 살아생전 즐겨 읽었다는 책의 사인(sign)이 ‘이활’이라는 친필로 확인되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즉 그는 평상시에 이활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해 왔었던 것이다. 이육사문학관을 찾아오는 이라면 이처럼 선생의 이름 8개에 대해서만 알아가도 선생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느끼고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1927년 첫 번째 수감이후 1944년 베이징 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17차례 수감되는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 강인한 정신을 보여주는 한 편, 시인으로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그렇기에 선생은 우리 역사에서 저항시인이라는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했으며, 그 중에서도 무장투쟁과 문학투쟁을 함께한 유일한 인물로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는 1930년 1월 3일 조선일보에 「말」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청포도」, 「광야」, 「절정」등 40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일제강점기 많은 문인들이 펜을 꺾거나 일제에 부역할 때도 뜻을 굽히지 않고 굳건히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시, 저항의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짐하는 시를 남긴 것이다. 선생이 문학을 통해 독립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었던 사실은 선생이 남긴  수필 「계절의 오행」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선생은 「계절의 오행」에서 시를 쓰는 이유에 대해 말했다. ‘나에게는 행동(行動)의연속(連續)만이 잇슬따름이오 행동(行動)은 말이 아니고 나에게는시(詩)를 생각는다는것도 행동(行動)이되는까닭이오’라고 즉, 시 역시 조국의 독립을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청포도」속에 등장하는  ‘내가 바라는 손님’을, 「광야」속에 등장하는 ‘천고의 뒤에 / 백마타고 오는 초인’을 어떠한 시련에도 꺾을 수 없었던 강인한 조국 독립의 의지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육사문학관은 안동시청에서 차로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도착하면 먼저 산 속에 펼쳐진 원촌(遠寸)의 풍경에 놀라게 된다. 왕모성(王母城)과 수정암(水晶岩) 쌍봉에 둘러싸인 넓은 분지에는 선생이 직접 말했듯 ‘말도 아니고 글도 아닌 무서운 규모’(「계절의 오행」중에서)가 느껴진다. 이때 무서운 규모란 아름다운 경치를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원촌의 풍경을 둘러보고 계단을 올라오면 이육사문학관 정신관이 있다. 정신관은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흩어져 있는 자료와 기록을 한 곳에 모아둔 곳으로 3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이육사 선생의 독립운동과 문학 활동, 순국, 그와 관련된 전반적인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격문사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의 자료와 모형, 그리고 시와 비평 등이 게재된 당시의 도서들을 통해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논객으로서의 선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베이징 감옥에서 순국 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독립운동가 이병희 여사의 생생한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생애 마지막 사진을 비롯하여, 서대문형무소 수감기록카드, 등록문화재 제713호인 육필원고 「편복」등 선생을 기억하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형무소를 재현해 놓아 고통스러웠던 수감 생활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2층은 선생의 흉상을 비롯하여 선생을 그리는 다양한 마음, 연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원촌마을과 가계도, 유학생활, 대구에서의 활동 등 선생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선생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볼 수 있으며,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 수감생활이 시작된 ‘장진홍의거 사건’, 육사라는 이름의 의미와 유래 등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또한 꽃맹아리 전시실이라는 작은 전시관에는 친인척 혹은 친우와 주고받은 편지를 비롯하여, 육필로 남긴 시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2층에는 문학카페 ‘노랑나븨’가 있는데, 카페에서는 원촌 마을의 전경을 보면서 잠시 휴식을 취하거나 관련된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다.                                                                                 

  3층은 선생의 다양한 활동을 연구할 수 있는 연구실이 있으며, 200명 정도가 함께 할 수 있는 다목적홀과 세미나실이 있다. 

  정신관을 관람하고 나오면 바로 앞에 육우당(六友堂)을 만날 수 있다. 육우당은 생가를 복원해 놓은 곳으로 여기서 선생의 육형제가 태어났으며, 육형제의 깊은 우의를 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건물의 구조는 ‘ㅁ’자 형태이며 앞채는 사랑채로 방 두 칸, 중간 마루 한 칸이고 뒤채는 방 두 칸, 마루 한 칸, 부엌 한 칸으로 되어있다. 사랑채의 오른편은 팔작지붕인 반면 왼편은 맞배지붕의 형태를 뛰고 있어 고풍스러운 목조건물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정신관 뒤에는 이육사문학관 생활관이 있는데, 이곳은 80명이 숙박을 할 수 있는 시설이다. 1실의 정원은 4명이며, 총 20개의 방이 있다. 또한 각 층마다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테라스가 마련되어 있어 문학관의 야경을 볼 수 있는데, 산책로를 따라 펼쳐지는 하늘의 별과 땅의 불빛이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장관을 이룬다. 특히 이곳 생활관은 경북북부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역사적 공간과 문학적 공간을 잇는 거점으로 활용이 용이하다.                                                                                 

 이육사문학관은 경상북도 제1호 공립문학관으로 지정되었으며, 현재까지도  경상북도 내 유일한 공립문학관이다. 따라서 이육사문학관에서는 그 규모와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봄, 여름, 가을이면 이육사문학축전이 열린다. 이육사문학축전에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과 학자들이 초청되어 학술발표, 북콘서트, 낭독회 등이 이루어지며, 시노래 가수와 다양한 극단이 초청되어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또한 이육사 선생이 살았던 시대와 그의 생애를 알 수 있는 이육사아카데미, 그의 문학을 통해 문학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생애전환 사업 등 다채로운 교육프로그램도 함께 운영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육사문학관에서는 육사 이원록 선생 추념식, 청포도 사생대회, 문학주간, 해외이육사문학제, 육사시문학상 시상식, 시낭송대회, 육사백일장, 문학학교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역사는 의식으로도 남지만 공간으로도 남는다. 특히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이 눈에 보이는 공간으로 남아있을 때, 우리를 이어 온 유구한 역사의 장엄함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자!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짐을 싸자. 그리고 오늘 당장 이육사문학관을 찾아 선생이 삶으로 보여준 강인한 정신을, 시로 그려놓은 서정의 세계를 몸으로 느껴보자.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백운로 525번지에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뜻깊은 장소가 있다. 일제의 폭력 앞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굴복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오며 절개를 지킨 사람, 온갖 고문과 고초에 병을 얻어 직접 투쟁을 할 수 없는 순간에도 글로써 끝까지 저항의지를 꺾지 않았던 사람, 그의 고향이 바로 도산면 원촌리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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