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프롤로그
“할아버지! 빨리 이야기 시작해주세요. 네?”
조그만 마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마을에는 모깃불 사이로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아이들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으흠. 으흐흠.”
“할아버지, 빨리 시작해줘요,”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재촉하지말고, 이제 이야기를 시작하마. 그러니까 아주 먼 옛날 옛적에……. 흠흠.”
할아버지는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이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할아버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여기 바로 앞산에는 커다란 늑대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단다. 그 늑대는 얼마나 용감한지 모든 동물들의 우두머리이자, 모든 동물들의 왕이었지.”
“그 늑대는 무섭게 생겼어요?”
“하하하! 아니란다. 그 늑대는 무섭게 생기지 않았단다. 아주 부드러운 털에 너그러운 눈빛을 가졌단다. 하지만 용기만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대단했지.”
“우와! 그럼 그 늑대가 아직도 산 어딘가에 살고 있는 거예요?”
이야기를 하고 있던 할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라. 지금은 그 늑대가 없지 않겠니? 또 모르지. 세상이 위기에 빠지면 그 늑대가 나타날는지.”
“야, 네가 자꾸 질문해서 할아버지 이야기가 다른 데로 세잖아. 집중해서 듣자고.”
“쳇! 궁금해서 안 물어볼 수가 있어야지.”
“그래, 그래 싸우지들 말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마. 늑대는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험한 세상을 버티고 살았단다. 무섭고 커다란 흑호의 공격에도, 백곰의 공격에도 무리를 지도하며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단다.”
“흑호, 백곰이요? 그런 종족도 있나요?”
“아주 오래 전 토(土)족 중에는 흑호의 종족이 있었지. 목(木)족 중에서는 백곰 종족이 있었고. 그러니까 아주 오래 전에는 수 많은 종족들이 함께 모여 살았단다. 그중에는 나쁜 종족도 있었고, 지금 우리가 보는 친구들처럼 착한 종족도 있었지.”
“할아버지, 늑대가 흑호와 백곰을 어떻게 이겼는지 말해주세요. 네?”
질문을 많이 하던 아이가 할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 아이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었다.
모깃불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는 마당에는 할아버지 주위로 십여 명의 아이들이 둘러앉아 할아버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래! 차근차근 이야기해주마. 아직 밤은 길잖니.”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흑호는 아주 무서운 종족이었단다. 다른 종족들 특히 같은 호랑이 족을 많이 괴롭혔지. 물론 힘이 약한 다른 동물들과 종족들도 많이 잡아먹었고.”
“그럼, 아주 나쁜 종족이네요.”
“그래, 나쁘다고 말할 수 있지. 하지만 자연에는 약육강식이란 것이 존재한단다. 강한 종족은 항상 약한 종족에게서 무언가를 빼앗으려고 하지.”
“이런! 완전 나쁜. 그럼 우리 같은 일(日)족이 나서서 모두를 물리치면 되잖아요.”
“우리 일족의 무기는 흑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지. 왜냐하면 흑호는…….”
“흑호는요?”
“흑호와 백곰은…….”
할아버지가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때, 갑자기 할아버지의 머리 뒤로 검붉은 빛을 내는 혜성이 지나갔다.
아이들은 낮처럼 밝아진 하늘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혜성은 너무 밝은 빛을 내며 지나가 마을을 마치 한낮처럼 비추었다.
할아버지는 아이들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밤은 너무 늦었구나. 내일 계속 이어서 이야기해주마. 오늘은 다들 집에 가서 자도록 하거라.”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말에 모두 입을 밖을 삐죽 내밀었지만,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노인은 옆에 있던 지팡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꺼져가는 모깃불이 마지막 힘을 내서 타오르고 있었다.
노인은 모깃불에 바람을 불어넣어 남아 있는 불씨를 완전히 껐다.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지팡이로 땅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 땅! 땅! -
지팡이가 땅에 부딪히는 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노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듯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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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종족들이 모여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 종족을 대표하는 족장들이었다.
노인 역시 한 종족의 족장이었다. 노인은 태양을 숭배하는 일(日)족을 이끌고 있었다.
노인이 들어서자 다른 다섯 부족의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을 맞이했다.
노인은 그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며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여섯 종족의 족장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목(木)족 족장이었다.
“모두 보셨지요. 밝게 빛나는 혜성이 산을 넘어가는 것을요?”
다른 다섯 족장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목족 족장은 마치 독수리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독수리,
목족은 나무와 숲을 숭배하는 종족으로 새의 형상, 독수리를 닮았다.
그때 토(土)족 족장이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드디어 그 시간이 온 것 같군요. 이렇게 빨리 그 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직 준비도 안 되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후.”
토족 족장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책상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토족 족장은 호랑이를 닮았다. 노란 털이 희끗희끗 하얗게 변해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묻어나지만 젊었을 적의 그 용맹함은 아직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제라도 빨리 준비를 해야지요. 지체하다가는 더 늦어요. 우리 모두, 아니 이 세계가, 이 별이 없어질 수 있어요.”
화(火)족 족장이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화족 족장은 토끼를 닮았다. 그렇다고 유약해 보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붉은 눈이 마치 커다란 불덩이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목, 토, 화족 이외에도 수(水)족과 금(金)족 족장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족장들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말도 없었다.
수족 족장은 마치 인어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모습보다는 턱을 다 가린 근엄한 수염이 무서워 보일 정도로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금족 족장은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책상을 툭툭 치며 다른 족장들의 말에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일족 종장이 입을 열었다.
“이미 사건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랜 전설로 전해지던 혜성이 이 별에 내려앉았습니다. 그 혜성은 이제 어둠의 아이를 만들겠지요. 그리고 전설대로 어둠의 아이가 우리 종족을 모두 죽이려고 하겠지요. 하지만 우리도 전혀 준비를 못 한 것은 아니니, 이제라도 그것을 시작합시다.”
일족 족장이 길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일족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종족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보유하고 있어 족장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대족장이라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인원이 많다고 해서 대족장이 된 것은 아니다.
일족 족장은 인품이나 성격, 그리고 실력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기에 다섯 족장의 추대를 받아 대족장이 되었다.
일족 족장의 말이 끝나자 금족 족장이 길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책상을 치던 동작을 멈추고 일족 족장에게 말했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요?”
금족 족장의 말에 일족 족장은 잠깐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도 같았지만, 다시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실패하면 모든 종족이 어둠의 아이에게 종말을 맞이하겠지요. 어쩌면 이 별과 영영 이별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실패해도 시도는 해봐야지요. 실패한다고, 두려워서 아무런 시도도 못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만히 앉아서 우리의 목숨을 어둠의 아이에게 고스란히 바치는 일 말고는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자 모든 족장이 고대를 끄덕였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든지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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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족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놓인 재단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작은 보따리를 꺼내 재단 위에 있는 흙으로 만든 항아리에 담았다.
토족 족장이 재단에서 내려오고 목족 족장이 자리로 올라가 신비한 빛깔이 도는 나무를 항아리 밑에 깔았다.
토족 족장이 재단에서 내려오자 이번에는 화족 족장이 올라갔다. 그리고는 양손을 모아 조용한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화사마사화라사.”
주문을 외우자 화족 족장의 손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이 일어났다.
화족 족장은 그 불꽃을 항아리 밑으로 던져 넣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에 항아리가 붉게 달아올라 곧 깨질 것만 같았다.
항아리에 불을 붙인 화족 족장은 재단에서 내려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화족 족장 다음으로 목족 족장이 재단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을 따라 불꽃이 더 커져 족장들이 모인 방안 전체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항아리가 퍽 소리와 함께 갈라졌다.
갈라진 항아리에서는 흙과 함께 붉은 액체가 흘러 재단 아래에 고였다.
금족 족장이 일어나 재단 아래에 놓인 금속 항아리에 붉은 액체만을 골라 담았다.
붉은 액체가 금속 항아리 안으로 들어가자 금속 항아리 역시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수족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단으로 올라갔다.
수족 족장은 재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주문을 외웠다.
“수마리사나수마리.”
그러자 수족 족장의 손에 큰 바다의 파도 같은 물결이 출렁였다.
수족 족장은 붉게 달아오른 항아리의 아래에 그 파도를 조금씩 아주 천천히 밀어 넣었다.
그러자 붉게 달아올랐던 항아리가 서서히 식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일그러진 모양에서 원래의 모양을 찾아 돌아왔다.
이제는 불이 이글거리는 소리도, 바람이 일어나는 소리도, 물결이 파도치는 소리도, 방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뒤 일족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은 항아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항아리를 품에 앉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일족 족장은 소중한 듯 품에 안은 항아리를 양손 높이 들어 올렸다.
일족 족장은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항아리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후!”
항아리는 무언가 신비스러운 빛이 굴곡을 따라 감도는 것 같았다.
일족 족장은 다른 족장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았다.
일족 족장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른 종족의 족장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족의 족장들과 눈빛이 마주친 일족 족장은 모두를 향해 말했다.
“이제는 성공과 실패를 떠나 믿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믿음, 이제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어둠의 아이를 무리 칠 수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이야아아압!”
일족 족장은 큰 소리로 기합을 지르며 항아리를 땅을 향해 세게 집어 던졌다.
- 쨍그랑 -
금속 항아리가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있는 벽에 부딪혀 여섯 족장의 귀에 울렸다.
- 쨍그랑, 쨍, 쨍. 째애앵……. -
항아리는 완전히 깨어져버렸다. 항아리를 영롱하게 감싸고 있던 빛도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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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한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으앙! 으으앙!”
일족 족장은 그 아이를 앉아 올렸다. 그리고 모든 족장에게 말했다.
“이제 이 아이를 믿는 방법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다섯 부족이 합심하여 만든 아이. 이 아이를 믿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입니다.”
일족 족장이 안고 있는 아이를 본 수족 족장이 일족 족장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누가 돌보는 것이 좋을까요? 저희는 물속에 살아서 아이를 키울 수 없습니다. 당연히 아이에게는 아가미가 없을 테니까요. 물론 자라면서 수족의 힘을 얻는다면 아가미가 생길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전에는 돌보기가 곤란합니다.”
수족 족장의 말에 모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때 성질이 급한 토족 족장이 먼저 말했다.
“싸움의 기술은 우리 토족이 최고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아이를 맡아 키우며 싸움의 기술을 가르치겠습니다. 어둠의 아이를 이길 수 있는 아이로 만들…….”
그러자 목족 족장이 토족 족장의 이야기를 끊으며 끼어들며 말했다.
“싸움의 기술은 우리 목족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리고 토족이 사는 평야보다 우리 목족이 사는 숲속이 아이를 보호하는 데 더 좋겠지요.”
토족 족장은 얼굴에 노기를 뛰며 다시 말했다.
“지금 토족의 싸움 기술을 무시하시는 겁니까? 토족의 싸움 기술은 오랜 세월 인정되어 온 것입니다. 태초부터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지요.”
토족 족장이 책상을 주먹으로 쾅 치며 말했다. 목족 족장 역시 화가난 얼굴로 토족 족장에게 말했다.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목족 역시 오랜 세월 싸움의 기술만큼은 인정받아온 종족입니다. 특히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싸움은 우리 목족을 따라 올 종족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이 귀중한 아이가 위험에 처할까. 그것이 걱정되어 하는 것입니다. 토족이 사는 평야는 언제나 적에게 노출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숲속에 잘 숨겨 수련시키는 것이 제일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토족 족장과 목족 족장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때 일족 족장이 말했다.
“이 아이는 인간의 모습과 가장 닮았습니다. 즉 일족의 모습과 가장 닮았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니 저희가 돌보겠습니다. 대신 다른 종족에서는 돌아가며 이 아이의 실력이 늘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대족장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금족 족장이 말했다.
“그런데 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부를까요?”
일족 족장은 금족 족장을 보며 말했다.
“전설에 따르면 흑호와 백곰을 물리친 것은 영리하고 용감한 늑대라고 했습니다. 그 늑대는 무리를 잘 이끌어 흑호와 백곰을 물리칠 수 있었죠. 그렇기에 이 아이의 이름은 큰 늑대라는 의미로 짓도록 하겠습니다.”
일족 족장의 말에 성질이 급한 토족 족장이 말했다.
“그래서 이름이 무엇입니까?”
일족 족장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태랑(泰狼), 태랑입니다. 큰 늑대. 이 아이는 늑대의 지혜로 우리 모두를 이끌어 반드시 어둠의 아이를 물리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