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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사탕 Aug 17. 2021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양이를 버리다'를 읽고)


책을 읽으면서 문득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벌써 이십 년도 넘게 지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작은 기억의 조각들만 만져질 뿐. 작가가 이 책을 쓴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문장으로 정리해 보고 싶다는 부담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버리러 해변에 갔던 기억을 시작으로 쓰기 시작했더니 의외로 문장이 술술 나왔다고 말이다. 아흔 살에 암으로 투병하다 돌아가셨고, 일본의 전쟁 때문에 젊은 시절을 전장에서 살았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 나갔다. 그 속에서 전쟁과 그리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 이런 이야기들을 보았다. 책을 덮으며 나라나 시대가 달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누구에게나 꽤나 묵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기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품림을 스쳐 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나의 핏줄을 더듬는 식으로 아버지와 관계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듣게 되었다.

<고양이를 버리다 중에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내 아버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보려 했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인생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 돌아보게 되니 말이다. 내 아버지는 평생 해오던 사업이 실패하고, 동생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난 후 자신의 추락을 감당하기 힘들어 하시다가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집안의 막내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기억이 많이 남아있다. 맛있는 간식을 사올 때 내 것만 따로 챙겨오기기도 했던 그런 단편적인 추억들이 아버지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른다. 언니, 오빠들이 했던 말과 함께 말이다.

“아빠는 왜 맨날 막내만 챙겨요? 제가 뭐가 예쁘다고.”

“막내니까 그렇지. 너희보다 한참 어리지 않니”

언니보다 7살, 오빠보다 5살 어린 나는 당연하게 막내의 위치를 열심히 누렸었다. 아빠가 재혼을 하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빠는 재혼을 선택하셨고, 엄마의 빈자리를 메워주기 위해 우리 삼남매에게 지극정성이셨던 탓에 우리는 더 배신감을 느꼈었다. 그리고는 바로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 태어났다. 아빠가 하시던 사업이 잘 되던 때라 제법 잘 살던 우리 집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동생은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고,엄청난 관심을 받고 자랐다. 어쩌면 나에게 향해 있던 아빠의 시선이 동생에게 옮겨간 것을 본 나는 배신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다니던 즈음, 아빠의 사업이 위태로워졌고 아빠는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가셨다. 회사에 들어가고 첫 해, 아빠는 나를 만나러 서울역으로 기차를 타고 올라오셨었다. 오랜만에 만난 아빠의 머리는 하얗게 변해 있었고, 내가 알던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던 탓에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결국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시고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결혼하기도 전에 엄마와 아빠를 다 여의고 혼자 남았다. 어쩌면 이런 부모님의 기억은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흔들고, 나를 변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은 ‘아버지가 일찍 전쟁에서 돌아가셨으면 나도 세상에 없었을 것이고, 내가 쓴 책도, 삶 자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 때문이었다. 아빠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했고, 나의 삶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이미 오래전에 잊혀지고 사라진 것 같았지만, 수 십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스쳐 간다. 어쩌면 내 존재 자체가 부모님에게서 시작된 탓이리라. 작가는 ‘우리가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빗방울이지만, 빗물 한 방울도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나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고 표현했다. 어쩌면 내 존재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닌 빗방울이지만 내가 살아있다는 그 우연한 사실 그 자체에 의미를 두어야 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작가가 일흔이 되어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모든 삶의 흔적을 살펴보고, 기억해 보는 것은 어쩌면 나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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