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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사탕 Aug 17. 2021

나의 패싱은?

(넬라 라슨의 '패싱'을 읽고)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 살고 있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몇 천명의 사람들을 조사한다고 해서 만족하는 사람들은 10%도 못 미치지 않을까?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매우 낮다는 것은 뉴스에 종종 등장한다.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패싱에서 만난 주인공들이 그랬다.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고, 자신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은.


패싱의 주인공들은 미국에서 살고 있는 흑인들이다. 미국은 지역마다 정책과 흑인에 관한 생각에도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고, 또 흑인들도 우리가 구분하기 어려운 백인과의 혼혈이나, 흑인 부모라고 하더라도 백인과 유사하게 보이는 피부색을 가진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정확히 미국의 인종적인 문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패싱의 기본 바탕은 1920년대 1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혼란이 있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쉽게 사회적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린은 시카고에 가족여행을 왔다가 드레이튼 호텔 옥상에서 차를 마시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 클레어 켄드리. 이렇게 만난 인연이 아이린의 생활 전체를 바꾸게 만든다. 아이린은 의사 남편과 아들 둘을 둔 중산층 주부이고, 사회적인 지위를 잘 유지하면서 봉사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잘 쌓으면서 자신의 주변을 탄탄히 지켜간다. 그런 그녀가 우연히 호텔 옥상에서 마주친 어렸을 때의 친구 클레어. 백인의 피부색을 가진 클레어는 패싱에 성공해서 백인 남편과 결혼하고,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속이면서 상류층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그녀가 여행중이었던 아이린을 만나고 난 후 계속 아이린에게 연락을 해오고 가까이 있기 원한다.


방금 손에서 놓은 그 편지는 아이린이 보기에 단어도 너무 헤픈 데다 표현도 적나라했다. 그것은 클레어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아마도 의도적이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하여간 연극을 하고 있다는 오랜 의구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한 아이린은 클레어에거 ‘노골적인 이기심’이라고 이름 붙인 그것을 용서할 마음도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생각, 하나의 질문이 클레어를 향한 불신과 분노와 뒤섞여 있었다. 왜 그녀 자신은 그날 말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벨루의 무식한 증오와 혐오 앞에서 자기 인종을 숨겼을까? 왜 벨루에게 반박하지 않은 채 그가 자기 주장을 하고 잘못된 생각을 입 밖에 내도록 놔뒀을까? 어째서 클레어 켄드리 때문에, 그런 고통을 겪게 만든 그녀 때문에 아이린은 자기 인종을 변호하려 나서지 못했을까?


아이린은 클레어의 인종에 대한 패싱 때문에 클레어를 피하려 계속 노력했지만 생각처럼 멀어지지 않고 계속 주변에 남았다. 인종 문제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마음이 너무 많아서 자꾸 고개가 돌려졌다. 나에 대해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많은 것, 남들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것,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해 자꾸 나타내질 때의 두려움.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외면할까봐 나에 대한 마지막 신뢰를 버리게 될까봐 무서운 것 말이다.


많은 순간, 우리도 클레어처럼 살고 있지 않을까 문득 생각하게 된다. 현재 나의 모습 중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잘 감추고, 마치 나는 상류층에 속한 사람, 아니, 중산층에 속했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싶어하지는 않는가. 혼자 취미를 즐기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내가 잘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때가 있다. 물론 꼭 나를 드러내고 싶어서가 아닐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들은 나의 존재감에 대한 욕구일 때가 많다. 클레어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말했다. ‘패싱’은 정말 알 수 없다니까. 우리는 패싱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용서하잖아요. 경멸하면서 동시에 감탄하고요.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패싱을 피하지만 그걸 보호하기도 하죠.(p 110)


(중략 )


그녀는 다르지만 똑같은, 두 종류의 충성심 사이에서 옴짝달싹 못 했다. 그녀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그녀가 속한 인종에 대한 것. 아, 인종이라니! 그것 때문에 아이린은 결박당한채 질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하건, 또한 전혀 취하지 않는다 해도, 어차피 무엇 하나는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것이 클레어일 수도, 그녀 자신일 수도 있었고 혹은 흑인 사회 전체일 수도 있었다. 아니, 셋 다일 수도 있다. 어떤 일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녀를 속수 무책으로 만들지 못할 것이다. (p 195)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은 의사이고, 아내에게도 친절하지만 냉소적인, 흑인 중산층으로서의 삶에 분노를 가지고 있다. 두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차별과 혐오의 땅인 미국을 벗어나 브라질로 가고 싶어했지만 아이린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하고, 늘 반만 발을 걸친 상태로 사는 것 같았다. 이런 브라이언이 클레어와 가깝게 지낸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린은 두려웠을 것 같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아슬아슬 줄타기 하듯이 남편에게 자신의 출생부터 어릴 때까지의 삶을 거짓으로 만들고, 심지어 자신의 인종까지 백인이라고 거짓말하면 가짜 삶을 사는 클레어는 행복했을까? 아름다운 외모,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사교술까지 잘 갖춘 클레어는 아이린에게 끊임없이 닿으려고 하면서 결국 그녀의 남편인 브라이언과 비밀의 관계가 된다. 책 내용만 읽어서는 아이린의 의심인지, 그것이 정말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 조차도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정말 아이린이 클레어를 발코니에서 밀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클레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해서 파티장에 찾아온 남편이 다가오는 것을 피하다가 실수로 떨어져서 죽게 된 것인지 정확치 않다. 하지만 아이린의 손이 클레어에게 닿았다는 것이 표현되어 있다. 아이린은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면서도 남편과 결혼생활을 끝낼 생각은 없다. 그냥 모른척, 자신의 가정과 사회적 지위가 망가지는 것을 인정할 수 없어 그냥 가슴만 태우고 있었다.


1920년대의 책이지만 문체나 이야기 내용이 쉽게 잘 읽히고, 마치 현재의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 인간의 삶이 시대와 관계없이 항상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서 있고, 기득권을 포기하기 힘든 본성을 가지고 있는 탓이리라. 문득 책을 덮으면서 ‘나는?’이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포기하지 못하는 현실의 문제는 무엇일까? 내가 밀어서 없애버리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게 하는 나를 위협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려면 뒤돌아보기를 한참은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뒤돌아보기를 시작하는 것 조차도 쉽지 않은 나는 도대체 어디를 바라보아야 하는 걸까 오늘도 다시 물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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