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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Aug 16. 2023

·글을 쓰는 이유

사진을 위한 사진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글을 누가 봐?”


아무도 내가 쓰는 글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물론 그 전에, '자기가 관심이 없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동


나는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 사진에 대해 뭔가를 써왔고 요즘도 쓰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글의 주제는 '사진'이고 사진에 대한 내 철학적 관점을 적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사진작가나 예술가가 되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여느 아마추어사진가들 처럼 사진의 주제나 내용에는 관심 두지 않고 주로 모양새(형식)에 치중했으며 피사체도 이것저것 집적거렸다.


한데 바로 그 부분이 문제였다. 철학적 고민이 담긴 그 글들이 너무 진지하게 보인 것이다. 어쩌면 약간 '전문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여기서 문제를 일으킨 쪽이 내가 아닌 사진'이라고 의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까지 진지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사진이 저절로 나를 철학적인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진에는 철학적 관념을 자극하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고 그 본질이 무엇인지가 모호했으며 무엇보다 그 분야 전문가들의 말에는 설득력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의문을 품고 이런저런 궁리들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철학적 담론이란 게 심각하고 진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만사가 문제없이 잘 돌아갈 때는 철학이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나는 사진작가나 예술가가 아니다. 전문사진가가 아니라 아마추어사진가이며, 사진에 철학적 조예나 깊이가 없다. 긴 시간 사진에 대해 철학적 고민을 해왔는데도 불구하고, 나와 내 사진은 바뀌거나 좋아지지 않고 그대로이다. 겉보기에 사진이 전보다 좀 나아 보이는 지는 잘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내가 촬영 팁을 몇 개 더 알게 되었고 후보정과 편집에 익숙해졌거나 아니면 피사체와 사진을 선별하는 눈이 까다롭게 변한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진에 별다른 진척은 없는 것 같다.


전에 아마추어로서 아마추어스러운 사진을 찍었듯이, 지금도 그러고 있는 것이다. 내 사진에는 여전히 철학이 없고 메시지가 실리지 않았으며 내용은 비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시선을 끌만큼 멋진 장관이 담기지도 않았다. (이건 물론, 내가 하려고만 든다면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여기에는 어떤 뚜렷한 한계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무튼 그게 사진의 한계인지 나의 한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은 나의 내면을 반영하지 않았고 생각이 깊어져도 사진은 전혀 깊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사진에는 묘한 측면이 있다. 도무지 글을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진을 하다 보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자꾸만 생긴다. 나는 그 동안 제법 많은 글을 썼지만, 실제로 사진에 대한 글 외에 다른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사진을 시작했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내 관심거리는 오직 사진뿐이었다. 여행도 아니고 풍경이나 풍물이나 사람도 아니고, 오로지 ‘사진 그 자체’가 내 글의 관심 주제였다. 오로지 ‘사진을 위한 사진’을 찍었고, ‘사진을 위한 글’을 썼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글’이란 걸 쓰게 된 것도 전적으로 사진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강조해서 말하지만, 이 부분은 참 이상한 일이다. 사실 그 전에 나는 그림도 그렸고 이런저런 악기도 배웠으며 스포츠 활동도 했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저 방법과 요령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급급했고, 생각이란 걸 할 겨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사진과 카메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서 취미삼아 사진을 시작했고, 다른 아마추사진가들처럼 가볍게 사진을 찍어왔다. 그런데 사진에서만 유독 철학적인 관념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사진에 특별히 더 깊게 접근하지 않았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나는 아마추어사진동호회에 가입해서 동호인들과 함께 유명한 사진 촬영지를 섭렵했고 혼자 도시 길거리에 나가서 거리풍경도 찍었다. 한 때는 이주를 마치고 철거가 시작되기 전의 재개발 주택단지에 찾아가 골목과 빈집을 뒤지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 흉내를 내기도 했다. 매크로렌즈를 사서 야생화 군락지로 찾아다녔고 공원이나 야외 들판에 나가서 식물과 곤충을 관찰하며 다양한 매크로 사진도 찍었다. 신문이나 잡지사 기자처럼 행세하며 축제나 행사장에 따라 다녔다. 오래 전에는 아름다운 모델사진을 찍기 위해 모터쇼나 패션쇼 현장에도 쫒아 다녔다.


커다란 망원렌즈에 컨버터를 장착해서 경마장과 스포츠 경기장에 찾아가기도 했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전에는 패션쇼 행사장이나 용인스피드웨이 같은 자동차 경기장 또는 지방에 있는 바이크 경기장과 개경주장 등에 가면, 아마추어사진가도 매스컴 기자들 틈에 끼어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때로는 돈을 지불하고 스튜디오 촬영모임에 참가해서 전문적인 조명 아래서 다양한 모델사진을 찍기도 했다. 물론 그건 호기심에 상업사진가나 광고사진가 흉내를 내 본 것이었다. 아마추어사진가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사진 활동을 즐겼고 나도 같은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다. 관심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고 두서도 일관성도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목적과 의도는 분명하다.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사진을 찍는 목적과 의도는 바로 '사진 그 자체'이고 ‘아름다운 사진을 얻는 것‘이다. 이른바 '사진을 위한 사진'으로 일견, ‘맹목적인 사진’인 셈이다. 흔히, '빛 사냥꾼'을 자처하며 빛을 사진의 주제로 내세우기도 하지만, 같은 입장이다. 사진은 ‘빛을 버무려서 만든 그림’이며 빛이 곧 사진이기 때문이다. 좋은 빛이 좋은 사진을 만들어 주기에, 오로지 빛을 탐닉한다는 것은 곧 사진을 탐한다는 뜻도 된다. 따라서 빛을 위한 사진이 곧 '사진을 위한 사진'이기도 하다.


여행을 위한 사진도 아니고 뭘 기록하고 기념하려고 찍는 사진도 아니다. 사회고발 같은 특별한 목적을 띠거나 구체적인 필요 때문에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 우리는 오로지 사진이 ‘잘 찍히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피사체나 촬영상황과 조건 등의 선택도 전부 그런 관점에서 결정한다. 사진이 잘 찍히는 장소와 그런 사물들을 찾아다니고 좋은 빛이 비치는 곳에만 카메라를 겨누는 것이다. 관심사는 사진의 아름다움뿐이고 목적과 의도 역시 '완벽한 아름다움'을 향하고 있다.


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아마추어사진가들의 그런 태도와 성향은 본질적으로는 거의 '예술가의 그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미(美) 즉,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식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마추어사진가들은 자기가 예술작품을 만든다거나 예술 활동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예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적인 것을 더 좋아하고, 창작물보다는 자연이 더 좋다. 상상이나 몽상이나 환영(幻影) 보다는 실제현실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과학을 좋아하고 신봉하지만 예술에 대해서는 그저 무덤덤한 입장..? 그 정도이다. 그래서 사진예술가가 되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물론 사진기자가 된다거나 상업사진가나 광고사진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웬일인지, 나는 ‘사진의 원리와 그 본질적인 성질’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저절로 의문이 떠올랐고, 내가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질문들이 마구 샘솟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문제도 제기하고, 사진이란 무엇인지 정의도 해보면서, 제법 ‘전문적이라고 오해 받을 법한 짓’을 해왔다. 그러니까, 문턱에 서서 그 안에 제대로 발도 들여놓지 않은 주제에, 그 세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는 꼴이 된 셈이다.




철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삶은 무엇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걸까?”


어떤 이유에서든, 삶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인생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면, 굳이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도 이 취미활동이 마냥 즐겁고 순조로웠다면 철학적인 생각은 하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진을 찍으면서, 그 안에 내포된 ‘부조리한 측면’을 너무 많이 발견했고, 마음속에 저절로 의문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좋은 사진은 어떤 사진일까?”

“사진가는 누구일까? 창작자일까? 기록하고 수집해서 보여주는 사람일까?”

“내가 찍은 사진은 내 의도대로 표현한 내 작품이 맞을까?"

"그렇다면 내 표현은 사진의 어느 부분에 어떤 형태로 담겨있을까?”


나는 사진을 찍을 때 마다, 거의 늘, 그런 의문들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짐짓 아는 체하는, 그리고 다소 딱딱하고 복잡하지만, 읽어봤자 답도 없고 실속이 별로 없는, 그런 글들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글들은, 누가 읽기를 바라서라기보다는, 내가 스스로 일의 자초지종을 한 번 정리해 보고 싶어서 적은 글이고 내용도 매우 상식적이고 아마추어적인 것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 무엇이 사진의 질을 구성하는가? 어떤 사진이 좋은 사진이며 어떤 사진이 형편없고 나쁜 사진인가? 사진의 질은 사진매체의 특성을 숙지하는 것과 비례하는가? 아니면 사진 찍히는 대상의 속성들에서 비롯되는가? 만약 인화지, 인화재료, 렌즈 그리고 빛에 전적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현실과 거래를 트는 방식에 달려있다면 사진 매체의 근본 토대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현실의 현존 때문에, 본디 사진은 애매모호하고 그 본질을 논의한다는 것이 도로徒勞에 불과한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에서 사진 작업과정의 반자동성, 다시 말해 선택과 구성의 모든 가능성 너머에 있는 사진이미지의 기록은 사진가의 조절능력을 벗어난다는 사실과 그 결과 사진가는 결국 거르고 선택하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로잘린드 클라우스, 사진.인덱스.현대미술) ]


한 마디로, ‘좋은 걸 만나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이 분명한 명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게 인용한 글의 요지다. 그렇다면 ‘당신은 대체 뭘 했는가?’ 라는 식으로 묻는 것이다. 인정하면, 당신의 사진이 전부 부정된다. 사진가란 좋은 것만 찾아다니는 호사가이며 사진은 수집품이고, 작품도 아니고 표현물도 아니다. 부정하면, ‘의미’에 대한 극심한 갈증을 느끼면서 또 다른 무수한 의혹에 휩싸이게 된다. 사진이란 매체가 지닌 미적 조형물로서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굳이 사진으로 찍어야 할 명분이 사라지고,  ‘차라리 그림을 그리지 그랬느냐’는 식의 핀잔이 뒤 따를 지도 모른다.


사진의 품질이 대상들의 속성에서 비롯되고, 그 성패가 장치나 빛과 같은 요소들의 상호작용에 주로 좌우된다면, 사진을 사진가의 작품이나 창작물로 볼 수 있을까? 사진가는 대체 뭘 ‘표현했다’고 봐야 할까? 사진이 (상당부분) 사람의 조절능력을 벗어나는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다면, 사진가가 가진 창의성이나 구성과 디자인에 대한 감각과 감수성 같은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진가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게 결국은 값비싼 장비를 살 수 있는 경제력과 좋은 피사체와 대면하기 위해 현실을 헤쳐 나가는 사회적 수완 정도가 전부인 게 아닐까?


실제로 카메라를 손에 쥐고 피사체를 만나는 데 따르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제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절박하게 다가왔다. 더 좋은 피사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던 것이다. 사진 찍는 시간이 길어지고 좋은 사진을 향한 열망이 커지면서 시선이 더 까다로워지고 선별의 기준도 엄격해졌을 테니, 아마 저절로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미적 감수성을 발휘해서 작품을 제작하는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먼저 피사체를 만나고 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만남에는 공짜가 하나도 없었다.


피사체를 만나려면 노력과 비용이 들뿐 아니라 행운이 따라야 했고, 사회적 수완이 필요했으며 때로는 편법까지 동원해야 할 때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상 앞에 서면, 그 때 내가 하는 일이란, 그야 말로 별 것 아니었다. 고작해야 ‘거르고 선택하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였다. 주객이 전도된 꼴이었다.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상대로 사진을 찍으려고 애를 쓰는 동안, 나는 점점 무기력해졌고,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되고 의심은 시간이 갈수록 짙어졌다. 그래서 마구 질문을 퍼붓게 되었다.




책이나 잡지나 매스컴 등에서 접하는 사진에 대한 관점들은 대부분 핀트가 어긋나있다.


전문사진가들의 관점은 온통 모순투성이고, 나는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긴 그 사람들의 관점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 분들이 생각하는 사진은 나와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의 사진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진기자나 상업사진가나 광고사진가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에, 항상 일정한 의도를 품고 대상에 접근할 수 있다. 방법을 찾으면 되고, 근원적인 고민은 거의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자기가 사진을 찍는 이유'부터 알아내야 한다. 목적도 이유도 모른 채, 막연히 뭔가를 하다 보면 언젠가는 명분 문제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왜 찍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난처하고 딱한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의 차원이 달라진다. 그러니 아마도 전문 사진가들에게는, 내가 하는 질문들이 '뜬금없는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사진예술가들의 입장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 사람들은 '예술을 하려고 사진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 분들이 자기 작업의 타당성을 납득시키기에 급급해서, 억지로 말을 짜맞추는 것만 같다. 예를 들어, 대다수의 사진예술가들은 '사진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정작 중요한건 아이디어'라는 얘기를 에둘러 말한 것이다. 나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관람하고, 굳이 돈을 주고 사가는 예술사진의 소비자들이 딱해 보인다.


내 생각에, '사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관점은 단지 '사진의 가치판단을 위한 시작점'이 되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사진 그 자체가 핵심'이 되는, '모종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지금은 비록 난해해 보이지만, 한쪽 극에서 다른 쪽 극에 이르는, 먼 길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뭔가 답이 될 만한 걸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나는 잘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사진 비평가와 철학자들이란, 원래,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이다. '말'이 없는 사진은 그 사람들 덕분에 '말'을 갖게 된다. 말은 사진을 설명하지만, 원래 없었던 것을 창안해 내기도 하면서, 무성한 말들이 사진을 추가로 장식하는 것이다. 때로 그 사람들의 말은 각자의 역량에 따라, 논점을 흐리기도 하고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논점을 흐리는 쪽은 주로 사진 비평가들이고 선명하게 드러내는 쪽은 철학자인 것 같다. 


비평가는 '사진에 맞춰서' 말을 지어내야 하는 입장이지만, 철학자들은 세상의 원리와 본질을 벗어나서 말을 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 필요해서 말을 지어내는 것만 같은 비평가들의 피상적인 말들은 설득력이 부족해서, 나는 거기에 공감을 할 수도 수긍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원래 그렇지만) 철학자들의 말에는 답이 없다. 그 사람들은 오직 질문만 양산한다. 답은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아무튼 나는 철학을 의도한 적도 없고, 그 분야에 남다른 식견도 관심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진이 나에게 저절로 '철학적인 글'을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긍정적인 태도로 순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부조리를 알아채고, 문제를 해결해서 올바른 답을 얻으려고 집착했던 것 같다. 


아마 이유를 알아야만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고지식한 성격이 한 몫 했지 싶다. 모든 아마추어사진가들이 나와 같은 짓을 하지는 않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내가 들먹이는 주제들은 (전문사진가든 아마추어든) 사진 찍는 사람은 당연히 부딪칠 수밖에 없는, 아주 평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아마추어사진가들의 열정은 전업사진가에 못지않고, 사용하는 장비도 충분히 전문적이다. 시간과 자원을 쏟아 부어 열심히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누구나 그 일의 의미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지 않을까?

그게 비록 취미활동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생계’라는 당면한 목적이 없는 일에 그토록 많은 노력과 자원을 퍼붓다 보면, 어느 날 문득 그 일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왜 그런 문제들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지 몹시 궁금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답을 모르겠는데... 혹시 다들 이미 결론을 내서, 나름의 답들을 손에 쥐고 있는 걸까? 나만 혼자 뒤쳐져서 머리를 썩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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